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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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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때리기'는 프랑스 정가의 전통 스포츠였다. 미국이 수틀린 짓을 할 때마다 프랑스는 비명 대신 조롱을 퍼부었다. 미국식 일방주의의 강도가 커질수록 프랑스의 조롱은 날을 세웠다. 도입자는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방미 중 "미국에서 가져가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마담 재클린 케네디뿐"이라고 답해 조국 해방자인 미국을 깔아뭉갰다.

9.11 테러 이후 입장이 바뀌었다. 이라크 전쟁 참여를 거부하면서 프랑스 정치인들은 틀니 빠진 입이 됐고 미국은 배은망덕한 프랑스를 마음껏 조롱했다. 프렌치 프라이는 프리덤 프라이로 바뀌었고 나폴레옹 옷을 입은 치킨(겁쟁이) 광고가 미국인들을 웃겼다.

이는 단지 조롱의 방향이 바뀐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강자와 약자는 분명 조롱에 대한 맷집이 다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우화가 그것을 설명한다.

매와 닭이 있었다. 매는 주인이 부르면 날아와 손목에 앉았지만 닭들은 주인이 다가오기만 해도 소리치며 달아났다. 매가 비웃었다. "너희 닭들은 배은망덕한 종족이야. 배가 고프지 않으면 절대 주인에게 가지 않지. 우리는 달라. 아무리 빠르고 강해도 먹여주고 길러준 주인을 잊지 않아." 수탉이 대꾸했다. "너희는 인간을 피하지 않지. 왜냐하면 불에 구운 매를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불에 구운 닭을 보거든."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조롱의 역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군주는 극도로 조롱을 삼가야 한다…군주만이 치명적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오간 조롱으로 미국과 프랑스가 입은 상처는 사뭇 차이가 난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2년 전 G8 정상회담에서 친구 아들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관용의 제스처로 어깨를 두드려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프랑스를 걱정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조롱이 방향을 바꿔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어서다. 한국을 가리켜 '이번 주의 배은망덕 1위' '미국 덕에 호사하는 가짜 생보자(Welfare Queen)'라고 비꼬는 소리가 들린다. 점점 잦아진다.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도 없지만 디오게네스처럼 당나귀 소리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현명하고 실리적인 대미관계 정립이 절실하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