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시장 커피수레, 아파트 옷수거함 … 몸에 밴 지혜 품은 생활용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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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에게 개집은 좋은 캔버스다. 허름하던 개집이 울부짖는 늑대가 등장하는 ‘사연 있는 개집’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지콜론북]

일상의 디자인
진선태 지음, 지콜론북
224쪽, 1만4000원

골목을 걷다 마주치는 재활용 의류수거함.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동네마다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 남대문시장 곳곳을 누비는 커피 카트는 화로·물통·커피·설탕 등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갖춘 신통방통한 모습이다.

 이런 일상도구에도 디자인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한국디자인학회 이사인 저자는 “당연히, 그것도 꽤 높은 디자인적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디자인으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이다.

 이런 디자인을 ‘버내큐러(vernacular·지방이나 시대 특유의) 디자인’이라고 일컫는다. ‘일상 순응적 디자인’ ‘비의도적 디자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작의도나 계획을 갖지 않고 전통적인 노하우나 일상의 지혜를 이용해 문제점을 해결해 온 디자인 방식을 말한다.

 결국 디자인이란 세련된, 고급스런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조건에 적응하기 위한 예사롭고도 불가결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만나는 수만 가지의 사물에서도 특유의 디자인적 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책에는 다양한 예시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화려하게 그려진 그래피티나 재치 있는 광고판 등은 도시 전체를 생기 있게 만들어준다. 볼펜 여러 개에 테이프를 둘둘 말아 만든 삼색볼펜, 우유팩 두 개를 겹쳐 만든 우유팩 공 등은 물건의 원래 모양과 쓰임새를 새롭게 해석한 디자인이다. 파란 비닐 위에 널어놓은 새빨간 고추, 낮은 지붕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운동화 등은 공유공간인 골목에서 사람 냄새 풍기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생활 속 디자인에는 종종 ‘키치(Kitsch) 양식’이 나타난다. ‘천박한, 야한, 대중취미의’ 등으로 해석되는 키치는 조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부조화스런 외형 등이 보여주는 통쾌한 미감이다. 저자는 이런 키치적 감성이 질서정연한 스타일에 익숙해진 기성 디자이너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다. 사용자가 직접 사물을 변용해 만든 물품은 생산자 입장에 서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할 수도 있다. 사용자를 최일선에서 배려해야 하는 디자이너가 다양한 일상을 이해하는 것은 더 나은 사용자 친화적 디자인을 탄생시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누구나 일상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느껴지는 주제지만 풍부한 사진자료와 감성적인 해설이 곁들여져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있다. 간장통을 붙여 만든 간판, 생수병을 이용한 카메라 거치대, 페트병을 잘라 만든 포장마차의 종이컵 분배기 등 물건에 담긴 독특한 아이디어에 미소가 번진다.

 내가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던 물건을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은 후다. 저자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의 삶과 아이디어가 집약된 이 물건이야말로 “일상 속 진솔함을 지닌 명품디자인”이라고.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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