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차관 나눔의 집 방문…"할머니들의 자존심이 우리나라의 자존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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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애쓰는 것도 알고 정부도 애쓰는 거 알아. 그런데 애만 썼지 아베는 눈도 끔쩍 안하고 있어. 일본이 돈으로 보상해준다고 해도 얼마를 보상해주겠어. 우리 15~16살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

경기도 광주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에 사는 유희남(86)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본에 끌려갔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의자 팔걸이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 할머니는 “세계적으로 힘을 써서 저희들 죽기 전에 분하고 억울한 마음, 우리들 원한 좀 풀어달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명예를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머니들의 자존심이 우리나라의 명예와 자존심입니다”고 말했다. 조 차관은 설 명절을 앞두고 6일 오후 나눔의 집을 찾았다.

나눔의 집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10명이 살고 있다. 이날 조 차관과 만나는 자리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5명이 나왔다. 나머지 할머니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나오지 못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지난달 26일에는 황선순 할머니가 31일에는 박위남 할머니가 별세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53명으로 줄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할머니들이 한ㆍ일 국장급 협의에 진전이 없어서 답답해하신다”며 “국장급 협의만 고집하지 말고 국제 중재위원회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살아생전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게 할머니들의 요구다”고 말했다.

조 차관을 만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에게 끌려갔던 경험부터 하나씩 이야기해 나갔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는 강일출(87) 할머니는 “강제로 끌려서 중국으로 가는데 엄마가 신도 못 신고 따라오며 안 된다고 외치던 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여러분들이 와줘서 속으로는 기쁘지만 일본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속으로 눈물이 내려간다”며 “우린 이제 가족도 없고 정부 밖에 믿을 사람 없다”며
울먹였다.

이옥선(88) 할머니는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건장한 남성으로부터 끌려가 중국으로 보내졌다”며 “(일본인들로부터) 매일 맞아서 얼굴이 형편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사죄만 받게 해 달라. 우리 전쟁이 아직 끝이 안 나고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은 조 차관은 “일본 정부로부터의 명예 회복은 안 됐지만 우리 국민들로부터는 할머니들의 명예와 자존심이 회복됐으니 위로를 드린다”고 답했다. 한일 국장급 협의와 관련해서 조 차관은 “지금까지 큰 진전은 없었지만 올해가 아주 중요한 한 해인만큼 양국이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며 “모든 가용한 채널을 동원해 국제사회에 이 문제가 단순한 한일 간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문제라는 것을 계속 홍보하겠다”고 설명했다.

나눔의 집은 조 차관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역사동화 『봉선화가 필 무렵』의 영문 번역본인 『TOUCH ME NOT』을 전달했다. 조 차관은 방명록에 ‘어르신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헛되지 않고 생존해 계시는 동안 명예를 회복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적고 나눔의 집을 나섰다. 조 차관은 "오늘 와서 직접 뵙고 이야기 들으니 마음이 숙연해진다"며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a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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