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환의 배틀배틀] 얼굴 치장 안 할 수도 없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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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그래서 큰 경기 직전 선수 대기실의 풍경은 아주 흥미롭다. 게이머들은 "메이크업 베이스는 꼭 해 주세요" "눈썹을 더 강조해 주세요" 등 이런저런 주문을 분장사에게 부탁한다. 단골 분장사들은 아예 선수의 경기 스타일과 이미지 등을 모두 고려해 메이크업을 해 준다. 그래서 경기 전 대기실은 매우 북적대는 동네 미용실에 온 느낌이다. 시간에 쫓길 것을 우려하는 선수들은 이미 숙소에서 메이크업을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한동안 메이크업을 받았다. 깔끔하게 분장을 할수록 TV 화면 속 내 얼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문제가 생겼다. 메이크업을 받고 경기장에 나가면 얼굴이 너무 갑갑해졌다. 두꺼운 메이크업을 한 채 시합장의 강한 조명을 받는 게 고역이었다. 그럴 땐 꼭 몸에서 열이 올라왔다. 그리고 열은 순식간에 얼굴까지 번졌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메이크업을 될수록 적게 받는다.

선수들 중에는 정기적으로 피부과를 찾는 경우도 많다. 과도한 스케줄과 훈련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어느새 피부 트러블이 생기기 십상이다. 최근 주목받는 선수들의 얼굴을 꼼꼼히 보면 알 수 있다. 불과 서너 달 전만 해도 피부 트러블로 고생하던 선수들이 지금은 보송보송한 피부를 자랑하기도 한다. 모두 꼼꼼한 관리의 결과다. 그래서 프로게이머들이 숙소에 모이면 자주 등장하는 얘깃거리 중 하나가 피부 얘기다. "어떻게 하면 피부가 좋아질까." 비단 연예인이나 젊은 여성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제 오프라인 경기에선 선수들이 메이크업을 사양하는 경우가 많다. 피부 보호를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의 e-스포츠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특성을 모두 안고 있다. 선수들에게 메이크업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나도 처음에는 '남자가 무슨 메이크업에 신경을 써? 차라리 그 시간에 연습이나 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프로게이머는 모든 면에서 프로다워야함을 말이다. 프로게이머에겐 경기 내용 못지않게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선 메이크업이 '무기'가 될 수 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한다.' 그게 나의 신념이다.

임요환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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