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밤길』····가락은 잘 지어졌지만 의미전달엔 미흡|『노을을 보며』····의미전달에 치중, 둘째수에선 가락 깨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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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시조의 형식(정형)이 곧바로 속박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제약된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말해 「의미(또는 이미지)를 가락(틀)에 소화하는 일」, 그것이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 뒤에 숨겨진 그 고충까지를 읽는 선자의 아픔은 크다.
창작의 공정 과정에서 의미와 가락이 상위하는 경우, 대개는 의미전달보다 가락 형성의 편을 쫓게 마련인것 같다. 일단은 그 평이 옳다고 헤아릴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되든 우선은 시조로 만들어놓고 보아야겠다는 의지에 힘입은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겠기 때문이다.
『입추』의 종장을 보자. 가락은 잘 지어졌지만, 그 의미의 전달이 불충분하다.
워낙 지은이의 의도는 「바닷가에서 사는 지인이 보내온 섭신에 갯내가 함께 묻어와 흩어놓는 시원한 바람」을 형상화하려 했단 듯하다. 그렇다면 가락을 살리는 범위안에서 그 표현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겠다. 가령 「갯내음 묻은 섭신이/날아와서 흩는 바람」쯤으로.
『바람』도 종장의 「돌리며」라는 구절은 「들리는 너」쯤으로만 고쳐놓아도 그 전체적 의미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밤길』은 그 초장의「손짓하면」이라는 구절을 「손짓따라」로 바꾸기만해도 그 의미 전달이 한결 수월하겠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안의 비』는 특히 그 초장이 문제다.
가락만 합격일뿐, 의미의 구체성이 결여됨으로써 손을 대볼 엄두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편 중장은 그 첫귀 끝에다 「에」라는 토씨를 넣음으로써 의미전달이 좀 확실해질까. 『노을을 보며』만은 위의 작품들이 안고있는 경우와는 반대현상을 빚고 있다. 곧 가락보다는 의미전달의 편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수 중장에서 두드러져 있는데, 이 또한 가락을 다지지 않으면서도 그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전달하도록 다스릴수 있을 것이다.
「피 목숨 마디 마디/신비로 노래 들리고」따위로.
위의 5편의 작품을 문학성으로 저울질하지만 않는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그다지 손색이 없을 시조들이다. 조금만 더 공력을 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에서 굳이 그 흠집을 캐내어본 것이다.
박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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