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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1)제79화 육사졸업생들(254)|6·1동기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바늘구멍같은 시험을 치르고 4년제 육사에 당당히 합격, 청운의 뜻을 펼치려던 청년들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으면서도 끝내 육사의 정규기에도 들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남다른 전우애로 잘 뭉쳐진 분들이 생도2기들이며 이들은 육사에 입학했던 6월1일을 따 71년 「6·1동기회」를 결성, 변공수회장을 중심으로 매달 한차례씩 모임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윤홍섭간사가 사생활을 거의 희생해가며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생도2기는 이와함께 71년 6윌25일 그들이 겨우 24일동안 몸담았던 모교의 제1연대 광장에 「6·1탑」을 세워 생도시절에 못다한 충혼의 뜻을 후배들에게 말없이 전하고 있다.
여기 「6·1탑」에 새져진 비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육사졸업생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의 막을 내리려한다.
「1950년 6월25일 여명, 북녘의 붉은 무리가 이 땅을 짓밟아 오먼 날. 지·인·용의 화랑대에서 푸른 꿈 키우던 생도2기생들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분연히 총칼들고 침략의 무리와 싸워 숱한 생도가 계급도 없이 화랑의 후예되어 옥처럼 부서져갔다.
아∼장하도다. 이 충성, 이 기백-. 오직 생도의 몸으로 구슬되어 값있고 영광되게 부서진 이 의국충정. 천추만대에 이 나라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리라.』
이 글을 연재해온 지난 10개월 동안 나는 어떻게 보냈는지조차 모를만큼 쏜살같이 살아온 느낌이다. 먼저 부족하고 부끄러운 졸고를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중앙일보로부터 이 글의 집필 의뢰를 받았을 때 처음엔 매우 망설였다. 우선 군문을 떠난지도 오래된 데다 글의 주인공 중엔 생존해 계시는 분이 많아 자칫 그분들께 본의 아닌 누를 끼칠까 두려웠고, 기억력은 자꾸 쇠잔해지는데 그 기억을 더듬어 사실대로 기록할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사 또는 한국군의 고면사는 누군가 반드시 정리해야 하고 언젠가는 기록으로 남겨야만 한다는 필요성과 증언해 줄 생존자가 더이상 줄어들기 전에, 그리고 나의 기억력이더 쇠퇴하기전에 기록해둘 것은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된 것이라.
연재하는 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은 참으로 고마웠다. 특히 육사 각동기생들의 혐조는 거의 결정적인 것이었다.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나의 집에 직접 찾아와 귀중한 자료와 사진들을 제공해 주었고, 또 산증인으로서 증언해준 많은 분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회를 거듭하면서 이 글의 반향이 실로 엄청난 데에 적이 놀랐다. 『육사졸업생들』에 관한 전화가 매일처럼 잇달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많은 편지들이 날아왔다.
어느 6·25전쟁 미망인은 남편의 최후 전투상황등을 좀더 소상히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장교는 군의 정간이요, 군인은 국가의 간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군은 국민 깊숙이 뿌리를 박아야 튼튼한 군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육사졸업생들은 장교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6·25라는 백척간두의 국가위기에서 이 나라를 지켰고 월남전과 숱한 반공전선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육사졸업생들의 자랑인 이분들의 넋이 영원히 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이 『육사졸업생들』로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전의 이야기는 일단 매듭을 짓게됐다. 여기까지의 주인공이이 된 육사 졸업생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독립초기부터 지금까지 국방은 물론 사회의 각 분야에서 많은 공을 이룩했다. 그러나 공이 많았던만큼 때로는 그릇된 일이 없지 않았던 점도 사실이다.
끝으로 선배 졸업생의 전통을 이어나갈 후배 육사생들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한다. <끝>

<제80화는 유진오박사의『한일회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에 이어 제80화로는 현민 유진오박사가 집필하는 『한일회담』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13년8개월간 7차례의 회담끝에 타결된 한일회담의 제l차대표및 제5차 수석대표로 참여했던 유박사는 그에 얽힌 풍성한 얘기를 소상하게 독자들에게 펼쳐드릴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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