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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포럼] 워싱턴 다녀간 노무현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시간으로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워싱턴을 다녀갔습니다.

대통령의 방미가 이처럼 온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적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할텐데" "잘 할수 있을까" "자알 하나 보자"는 등 국내에서는 온갖 반응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의 언론들도 적잖이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물론 그네들의 관심이란 '혹시 양국 정상회담에서 무슨 안좋은 일이 벌어지는게 아니냐'는 식의 부정적인 쪽이 많았던게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그건 뉴스거리를 쫓아다니는 언론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노대통령은 제가 민주당에 출입할 당시 후보가 된 분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특파원이란 관계 이외에도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이박 삼일간의 일정동안 노대통령은 14일 오전에 백악관 영빈관(블레어 하우스라고 합니다)에서 특파원들과 짧은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한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 후보시절 노대통령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는걸 누구나 금방 눈치채게 행동했습니다.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특히 그것이 '원칙'이나 '소신'에 관한 문제라고 여겨지면,노후보는 즉각 반박을 하고 불같이 반응했습니다.

한데 블레어 하우스에서 만난 '대통령 노무현'은 많이 달라보였습니다.특히 미국과 관련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표현이 정중했고,자신을 낮추려는 모습을 보여 "정말 노대통령 맞아?"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회견 말미에 어떤 특파원이 "미국에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라고 대놓고 물었지만 노대통령은 "친구를 설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라고 답변하더군요.

이날 저녁에 있었던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만찬이 이례적으로 화기애애 했다는 건 보도를 봐서 아실 겁니다.

그건 그냥 인사치레가 아닙니다.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 못지 않게 자기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얼마전에도 골프를 치다가 기자들이 무슨 질문을 하니까 "나는 한번 답변 안한다면 안한다"면서 계속 골프를 쳤다고 하죠?

한데 로즈 가든으로 나올때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거의 얼싸 안다시피 하고 있더군요. 기자 회견을 하는동안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보니까 그 양반이 최대한 기분이 좋을때 나타나는, 비실비실 웃는 듯한 그 독특한 미소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그건 영국의 블레어 총리하고 있을때나 나오는 표정인데.....

만찬장에서는 또 "노대통령이 있으니까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라고 했다고 하죠?

저는 노대통령에게 감탄했습니다. 아무리봐도 두 사람의 성향은 같은 수가 없는데,한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죽도록 고생하며 컸고,대학은 안나왔어도 머리는 좋아서 고시를 봐서 인생을 개척한 자수성가형이고, 다른 한 분은 상원의원 아들로 태어나 호강하며 컸고 명문대를 나왔지만 지적 능력은 약간 의심을 받는 행운아형인데 어떻게 '코드'를 맞춘 걸까요.

노대통령이 돌파력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해당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노대통령이 자기 성질과 생각 다 죽여가면서 저렇게까지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일종의 연민도 들었습니다. 북핵 문제는 자꾸 꼬여가고,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대통령이 받는 정보야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언론에 보도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이있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노대통령이 저렇게까지 하는걸 보니 국내 경제 사정이나 북핵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모양이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노대통령이 연기를 했든,성질을 죽였든,사람이 달라졌든간에 부시 대통령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맺고 간데 대해 참 칭찬을 하고 싶습니다.
아예 안오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또 부시와도 한판 붙고,그래서 부시 행정부내에서 "미군도 철군하고,북한도 폭격하자"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되는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어렵습니다.국가를 위해서,국민들을 위해서 때론 연기도 하고,굴욕도 참고,그러는 자리 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하듯이.

이번에는 노대통령이 말실수를 거의 안했다는 점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어찌보면 노대통령은 과거에 자기가 미국과 관련해서 했던 과격한 발언들을 되돌리느라 하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한 측면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노대통령이 외교에 있어서 국가원수가 말을 함부로 하면 얼마나 큰 피해가 돌아오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방미와 관련해서 지적하고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

우선 광고 문제입니다. 노대통령이 부시와 만난 14일 아침에 워싱턴 포스트지에는 삼성의 협찬광고가 신문 2개면 전체광고로 났고,바로 한장을 넘기면 현대의 광고가 1개면 전체 광고로 났습니다.

거기만 그런게 아닙니다.뉴욕 타임스에도 나고,로스엔젤레스 타임스지에도 나고,워싱턴의 한국 신문들에도 나고...
14일 CNN에는 하루 종일 한국 광고가 쉴새없이 나오는데 노대통령까지 출연해 '한국이 어떠냐'고 홍보를 하는데 솔직히 '참 촌스럽더라'는게 광고를 본 사람들의 중평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대체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서 광고를 하는 겁니까. 국민 세금으로 된 예산이 아니면 결국 기업들의 협찬(말이 좋아서)을 받은 건데 노무현 정부도 그런 짓 합니까? 그런 것 안하겠다고,그런 것 나쁘다고 비판하면서 대통령이 된 정부 아닙니까.

게다가 광고의 내용도 예를 들면 '한미 동맹 50주년,우리가 나눈 피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식으로 좀 더 세련되고,미국인들의 감정을 움직일만한 우회 광고가 아니라, 대통령 사진만 대문짝만하게 내보내 '축 방문'하는 식이니 옛날에 군사정권때나 하던 짓을,아프리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왜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대통령의 방미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대규모의 기업 회장단이 동행했습니다. 그것도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결국 기업이 잘돼야 한다는걸, 말만 앞세우는 정치개혁을 백번을 해도 나라가 깡통 차면 아무 소용없고,기업이 제대로 사업을 할 조건을 만들어 주고 정치인들이 기업에서 돈 뜯어가는 짓 못하게 하면 정치 개혁은 저절로 된다는 걸 노대통령이 이번에 절감하게 됐다면 말입니다.

한데 노대통령은 앞으로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노대통령을 지지했던 '반미'성향의 젊은 유권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걱정이 될 겁니다.

하지만 만일 노대통령이 귀국해서 미국에서 보여준 행동이나 발언들을 하루 아침에 뒤집어 버린다면 그건 미국에 오지 않은것 보다 못해집니다.
미국에서는 '신뢰와 신용'를 잃어버리면 거의 사회생활 못합니다. 거짓말했다는게 가장 큰 욕인 곳입니다.

노대통령이 미국에 와서 연기를 했던 건지,진짜 생각이 바뀐 건지 모르지만, 미국으로부터 '말과 행동이 다른 못믿을 사람'이란 평가를 받으면 그땐 정말 어려워진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노대통령은 난생 처음이라는 미국 방문에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어색한 표정으로 쑥스런 웃음을 지으며 로즈 가든에 서있던 노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속에서 노대통령이 앞으로 대한민국 호를 어떻게 몰고 갈지 더 많은 고민을 하시길 당부합니다.

김종혁 워싱턴 특파원

김종혁특파원의 워싱턴 원정기 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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