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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방은진 , 배우서 '오로라 공주' 감독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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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순진해 뵈는 제목과 달리 '오로라 공주'(27일 개봉)는 잔혹한 연쇄살인이 소재인, 한마디로 '센 영화'다. 다섯 건 살인의 희생자들은 언뜻 두 부류로 보인다. 하나는 의붓딸을 학대하거나 밥집 아줌마를 함부로 대하는 속칭 '싸가지 없는' 여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택시의 첫 손님으로 여자를 기피하거나 거래·취업을 미끼로 치근대는 이른바 '재수 없는' 남자들이다.

언뜻 황당할 정도로 우발적인 응징처럼 보이는 이런 일련의 살인은 사실은 아이를 잃은 엄마 정순정(엄정화)의 가공할 복수극임이 차츰 드러난다. 여자의 복수라는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를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죄의식에 발목 잡힌 금자와 달리 정순정은 일종의 반전을 감춰둔 마지막 대목까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강력한 복수를 밀어붙인다. 이혼한 전남편이자 형사인 오성호(문성근)가 종교에 기대 구원을 얻으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다.

이런 영화로 연출 데뷔를 하는 방은진(40)감독은 이제 충무로에 희귀한 '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대신 '여성'감독이라는 브랜드를 달게 될 것 같다.

"복수와 집념에 대한 얘기죠. 정순정은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자학에 빠져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목표를 향해서,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돌진해 나갑니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모성인 것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여성의 집념을 그리고 싶었어요."

'모성'보다는 '여성'을 강조하는 방 감독은 "정순정에게 딸아이는 자신이 애정을 쏟아부은 대상일 뿐 아니라 아마도 자신에게 애정을 준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 설명처럼 영화 속에서 정순정은 때로는 직접 딸아이의 목소리를 내면서 중첩된 자아를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는 일종의 트릭이 있다. 아이가 실종된 상황을 보여주는 회상 장면은 어쩌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정순정이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추정일 수 있다. 정순정이 광적인 살인마일 수도,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한 지능범일 수도 있다는 두 가능성은 막판까지 영화의 긴장을 유지하는 배경이 된다.

연극무대에서 출발해 영화 '태백산맥' '301.302'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그가 감독으로의 변신을 결심한 데는 여배우로서의 자의식이 무관하지 않다.

"30대 중반 들어서 역할의 폭이 줄어들었어요. 남자배우들은 40대에도 30대 역할을 하는데, 왜 여배우들은 나이의 폭을 넘어서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스타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메라에 담는 세상이 너무 좋은데, 카메라 뒤에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1990년대 말부터 단편영화 작업을 시작했죠."

장편 데뷔작이 '오로라 공주'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강우석 감독이 건네준 다른 작가의 원작 시나리오가 출발이었다. "기왕에 하는 것, 흔히 여자감독이 할 법하지 않아 보이는 얘기를 해보라는 뜻이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1년여에 걸쳐 수십 차례 시나리오를 고쳐 쓰면서는 매번 이창동 감독에게 감수를 청했다. "옷감을 잘라 새 옷을 짓는 것보다 옷 수선하는 게 더 힘들잖아요. 남자들의 캐릭터를 만드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내가 연애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남자를 참 모르는구나 싶었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배우로서의 경험이 톡톡히 도움이 됐다. "내가 전에 이건 문제다 싶었던 건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들이 흔히 하는 '그거 말고 딴 거 없어'하는 식의 연기 주문 같은 거죠."

주연배우로 호흡을 맞춘 엄정화씨 역시 맞장구를 친다. "배우의 감정 흐름에 맞춰 구체적인 연기 주문을 하는 점이 참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절대 배우와 감독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도 없었죠. 제가 감독님한테 대사를 직접 읽어보라고 요구해도 한 번도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면 제 연기가 아니라면서요."

방 감독은 배우의 역할은 "자신을 버리고 남이 되는 것"인 반면 감독의 일은 "남들의 것을 다 그러모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교했다. 배우로서 감정에 몰입하는 것보다도 감독으로 대규모 스태프를 이끌면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현장의 긴장감을 맛보는 것이 재미있더라"고 했다.

'오로라 공주'는 잔혹한 줄거리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아귀를 딱딱 맞춰나가는 대중적인 호흡과 색채의 대비가 뚜렷한 영상미까지 갖췄다. 방 감독은 "이제 데뷔작일 뿐인데, 제 스타일이라고 할 게 있겠느냐"면서 다른 스태프들의 공으로 돌렸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주연] 엄정화 "잔혹 복수극 넉 달 동안 악몽 시달려"

"여배우가 흔히 해볼 수 없는 역할이잖아요. 감정적인 흐름도 크고. 시나리오를 보고 죽자사자 하겠다고 달려들었죠. 그러니까 더 조바심이 나요.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나섰는데, 결과가 어떨지."

'오로라 공주'의 주연을 맡은 엄정화(34)씨의 말이다. 소재가 소재였던 만큼 넉 달 반의 촬영기간 동안 그는 악몽에 곧잘 시달렸다고 한다. 직후에 촬영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발랄한 이혼녀 역할을 연기하면서도 정순정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오로라 공주'에서 특히 힘들었던 대목으로 전남편 오성호와 정순정의 격렬한 정사 장면을 꼽았다. 애정이 배제된, 그야말로 동물적인 욕망만이 보이는 이 장면에서 정순정의 감정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격렬함으로 치면 피 터지는 몸싸움을 벌여 변호사(장현성)를 납치한 뒤 쓰레기 매립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정순정이 마치 신들린 듯 딸아이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모습은 이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았느냐고요? 제가 원래 예쁜 배우가 아니래서요." 한편으로는 연쇄살인의 끔찍함과 비교해 정순정의 모습이 너무 단정한 건 아닐까. "배우가 망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여자가 미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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