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위헌 결정 10년 … 드라마선 아직도 “호적 파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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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띠동갑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호적을 파서 나가라고 할 겁니다.”(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

 “내 나이가 몇인데 이것을 호적에 올려?”(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내용의 일부다. 이런 대화는 일상생활에서도 오간다. 하지만 호적에 올리는 것도, 호적에서 파내는 것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현행법상 호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호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이어지는 걸까.

호주제 위헌 결정이 났을 때만 해도 큰 변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 청송 심씨 혜령공파 등 일부 문중에서는 재산 분배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줄소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재산 분배 소송을 빼면 정작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본적(本籍)’이다. 정부는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2008년부터 본적 대신 ‘등록기준지’를 사용하게 했다. 등록기준지와 본적은 엄연히 다르다. 본적은 호주의 호적(戶籍)이 있는 장소다.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나 출신지를 식별하는 기준이다. 반면 등록기준지는 법적·행정적 편의를 위해 등록하는 장소다. 호적과 달리 변경도 자유롭다. 하지만 취업·진학 등의 실생활에서는 등록기준지보다 본적이 더 통용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경찰청이나 국방부 등 일부 공공기관에서도 행정서류에 본적을 기입하게 한다. 한 공무원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없어졌다고 배웠는데, 막상 합격한 뒤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려고 하니 본적을 적도록 돼 있어서 의아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호적 대신 도입한 가족관계등록부 제도도 사실상 연착륙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일단 이름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는 점이 거론된다.

 본적을 대체한 등록기준지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며느리는 본인이 변경 절차를 밟지 않으면 자동으로 시아버지나 남편이 사용하던 예전 본적지가 등록기준지로 기록됐다. 호주제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증명서가 없어도 주변 사람의 진술만으로 출생과 사망등록을 할 수 있게 한 ‘인우(隣友)보증제’도 마찬가지다. 이 제도는 병원이나 전문 장례식장이 부족한 일제 시대 때 도입됐다. 현재 자녀의 학교 입학을 일부러 늦추거나 부모 사망 후에도 연금을 받는 등의 편법에 악용되기도 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송효진 박사는 “호주제 고수론자들과 일부 타협하다 보니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며 “호적·본적 등에 비해 가족관계등록부 등은 입에 붙지 않아 외면받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제도가 바뀌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혜경·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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