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투명 화장법과 두 혜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전수경
화가

바쁘다. 만남들의 연속이다. 지난해에 묵혀두었던 약속과 새해를 맞는 모임들로 내 일정표가 빼곡하다. 모임 자리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나는 일하는 화가로서 분주한 일정을 잘 소화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게 맞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는지 항상 되물어 본다.

 지난달 어느 모임에서 창가 모퉁이를 등지고 화장하는 젊은 여성을 봤다. 안정된 자리가 아님에도 그는 차분히 얼굴에 분첩을 두드리고 속눈썹의 올을 낱낱이 살려냈다. 부러웠다. 그는 자신의 일과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법을 아는 듯 보였다. 그날 나의 화실로 오르는 언덕에서 나는 쪽달을 봤다. 창가의 여인이 완성한 이마의 광채와 닮았다. 그 빛은 애써 나를 자극하지 않은 채 포근하게 나의 지친 몸을 덮었다.

 지난해 봄 뭇 여성들을 설레게 했던 TV 드라마 ‘밀회’에서 주인공 오혜원(김희애 분)은 스무 살 연하의 청년 이선재(유아인 분)와 사랑을 한다. 여기서 혜원은 광택이 두드러진 얼굴 화장으로 젊은 연인을 유혹한다. 혜원의 움직임과 표정에 따라 변화하는 광채는 시청자의 삶에 놓쳐버린 열망을 어루만지고 차오르게 한다.

 혜원의 얼굴은 빛을 품지만 번들거리지 않는다. 그의 광택은 기름기 없는 맑은 피부에서 돋는다. 광원에 피부가 반사되기보다 오히려 피부 그 자체의 빛이 고인 듯하다. 혜원의 화장법은 일명 ‘물광 화장’으로 불리고 개그 프로그램에 차용되기까지 한다. 이는 이제 문화 현상이 되었고 화장품 산업에 영향을 끼친다. 물광 화장의 핵심은 수분의 적용과 비비크림(Blemish Balm)의 활용에 있다. 그것은 피부를 가리는 개념이 아니라 피부에 수용성 용액을 스미게 해서 자연스러운 빛을 띠게 하는 미적 전략이다.

 1990년대 말 피부 관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마무리 단계에서 독일제의 탁한 살구색 의료용 크림을 발라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 비비크림과 나의 첫 만남이다. 비비크림은 피부의 색조를 보정하고 피부에 스며들기에 생기 있는 맨 얼굴의 활기를 돋운다. 이에 기초한 ‘투명 화장법’은 이제 한류의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되었다. 애초에 화상 치료제로 개발된 단순 의약품이었던 비비크림이 한국에서 문화의 매체로 재창출된 셈이다. 그것은 피부를 덮지 않고 피부의 결과 흐름을 그대로 노출한다. 자극적 호소 없이 보는 이의 눈길을 이끈다. 최근에 보급된 디지털TV는 비비크림에 의한 화장법의 변화뿐만 아니라 화장한 얼굴을 읽는 방법마저 바꾼 듯하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에 내가 본 쪽달과 닮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주변이 먹으로 둘러져 종이 그 자체로 남은 형태다. 혜원은 칠로 덮지 않고 남김으로써 달이라는 밝은 광채의 사물을 드러낸 것이다. 혜원의 유명한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의 얼굴은 채색이 절제되고 맑은 담채(淡彩)로 그려졌다. 배경의 색과 거의 유사해서 그 피부가 투명하고 맑게 다가온다. 이 그림의 미인에 적용된 화장법이 담장(淡粧)이다. 담장은 색채 화장인 농장(濃粧)이나 요염한 화장인 염장(艶粧)과 달리 밝고 깨끗한 낯빛을 유지하는 화장법이다. 혜원은 엷은 붓 끝으로 미인의 눈썹을 가늘게 훑고 귀 뒤로 넘기는 이마의 머릿결을 한 올 한 올 그 방향을 따랐다. 바람에 날리는 미인의 목덜미의 털과 머리카락을 옅은 먹으로 그 결들을 일일이 챙겼다.

 혜원의 미인도에 처리된 화가의 손길은 보는 이의 눈길을 그림으로 이끈다. 종이에 스미는 맑은 담채의 흡수와 머리카락의 방향, 얼굴 윤곽의 가는 선들은 우리의 시선이 자발적으로 그의 생김새를 읽어가도록 안내 받는다. 혜원의 붓질이 내가 그날 창가에서 본 화장하는 젊은 여인의 손끝까지 유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투명 화장법이 과거의 담장과 맞닿아 있다. 이는 가리지 않은 자연스러운 민낯의 광채와 생기에 대한 긍정이자 한국형 얼굴에 대한 자신감이다. 자신의 얼굴을 화선지 삼아 매일 매번 거기에 맑은 그림을 그리는 그 창가 여인의 자신감은 좁은 화실에 박혀 분투하는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