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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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가 거액의 자료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청진동 바닥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실은 이문구네 한국문학 사무실에 가서 내 스스로 참지 못 하고 노름판에서 한밑천 잡았다는 식으로 장광설을 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을 패를 바꾸어 가며 퍼마셨다. 최민이는 덩치도 작은 것이 어찌나 줄기차게 마시는지 최후까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나중에는 집에 들어갈 시간도 없고 하여 일행 중의 두어 사람이 인근 재래시장에 가서 러닝셔츠와 팬티 등속의 내의며 양말을 사다 나누어 주면 킬킬거리며 갈아입었다. 그리고 '운기조식' 한다고 느지막이 점심 겸 해장하고 나서 장급 여관에 들어가 오후까지 낮잠 한숨씩 때리는 거였다. 그러면 땅거미 질 무렵에는 다시 숙취에서 깨어나 눈빛이 반짝반짝 말술이라도 마셔댈 것 같은 기세로 거리에 나서던 것이다. 하여튼 자료비 받은 것을 거의 거덜을 내고 조금 남았던 것마저 집에 들어갈 때 그래도 가장의 체면은 남아 있어서 원고료랍시고 아내에게 갖다주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야말로 자료비를 마련할 걱정이 태산처럼 짓눌러 왔다.

- 에잇 까짓 거, 생각보다 희귀본들이 비싸더라고 해야지.

나는 하는 수 없이 장기영을 다시 찾아갔다. 부장을 거치면 날짜도 며칠 걸릴 테고 번거로워서 그냥 무턱대고 비서실로 올라가 회장 만나러 왔다니까 마침 한가했던지 들어오란다.

- 그래 우리 연재소설 준비는 잘 돼 가나?

-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문인 친구들 모두 호주머니가 가벼워서 내 자료비로 오랜만에 크게 한잔들 먹었습니다.

- 아니, 그럼 그 돈으루 몽땅 마셨단 말인가?

- 뭐 단솥에 물 붓기죠.

장기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수표 끊어서 내주고 거기에 자기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메모를 한다.

- 이번에는 꼭 자료를 사게. 이건 내 명함인데 말야, 여기 적은 게 내 단골 술집 전화번호야. 딴 데 가서 마시지 말고 친구들이랑 이 집에 가서 마시라구. 내 앞으루 달아놓구 말야.

이런 사정을 몰랐다가 나중에 듣게 된 부장은 화가 나서 펄펄 뛰었고 일반 기자들은 꽤나 재미있어 하면서 우리 얘기를 한참이나 술안주로 올렸다. 나는 미루었던 여러 가지 고서와 희귀본들을 사들였고 자료는 점점 불어나서 비좁은 셋방에 다리 뻗을 데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 보면 장기영은 기자들에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도와주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내가 드디어 처음으로 신문 연재 사상 유례가 없는 일주일의 펑크를 내고 잠적했을 때, 당시 문화부의 병아리 기자였던 김훈이가 나를 잡으러 온 시내를 뒤지고 다녔다.

- 황모씨 안 왔어요?

- 한 달쯤 됐나, 요샌 안 보이는데….

- 황아무개씨 여기 안 왔어요?

- 아아, 방금 두 시간 전에 들렀어요.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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