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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5)제79화 육사졸업생들(228)비둘기부대|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제2차 파월부대를 통상 「비둘기부대」라고 말하지만 공식명칭은 주월한국군사원조단(ROKMAClV)이었다.
64년말 2차파병이 결정된후 육군본부는 파병작업을 비밀리에 진행시키면서 평화를 위한 계획이라고 해서「비둘기 계획」이라고 불렀고 각 참모부의 기획처장들로 구성된 「비둘기기획단」이 이 기획을 일괄 성안했었다.
그래서 2차파병부대가 결단된후「주월한국군사원조단」이라고 호칭하기가 어쩐지 너무 길고 딱딱해 평화의 뜻이 당긴 「비둘기부대」로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65년1월30일 국방부는 초대 주월한국군사원조단 단장에 조문환준장(육사7기특별·중장예편·전국가안보회의상근위원겸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임명하고 부대훈련을 맡겼다.
육본 인사참모부 기획처장으로 있으면서 「비둘기기획단」 멤버였던 조장군은 우리 육군 공수특전단을 창설한 특수전의 1인자로 파월되기 직전까지 1백57회의 패러슈트 점프 기록을 갖고 있었다.
당초 비둘기부대 단장에는 당시 2군사령부 군수참모로 있던 김홍규준장(육사7기·준장예편)이 내정되었으나 신병때문에 그 자리를 사양해 조장군이 부대장에 임명된 것이다.
비둘기부대 파병당시 부대편성은 장교나 사병 모두 자원제를 채택했었다.
유근창육본인사참모부장 (육사2기·중장예편·전토지개발공사 사장)은 김장군이 부대장직을 고사하자 조장군을 상부에 추천하기로 마음먹고 먼저 본인의 의사부터 타진했었다고 한다.
유장군으로부터 파월부대장 제의를 받은 조장군은 『군인은 명령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닙니까』라면서 즉석에서 수락했다고 한다.
조장군은 비둘기부대장에 임명된 직후 l군사령부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 비둘기부대의 편성 훈련은 1군사령관 책임아래 있었다.
조장군은 나에게 이미 편성된 부대원중 경비대대 지휘관을 가급적이면 특수전 경험이 많은 장교들로 교체했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었다.
공병대대의 임무를 지원하는 경비대대는 아무래도 베트콩과 일전을 각오해야 했던 만큼 특수전에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 좋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그가 파월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과거 함께 공수부대에서 근무했던 장병들이 앞은 다투어 파월을 자원하고 나서던 터였다. 그래서 경비대대 장교 일부는 조장군의 뜻에 따라 교체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래서 1차 비둘기부대 파월때는 공수단 출신 장교와 하사관들이 상당수 참전했었다.
그때 조장군과 함께 떠난 몇몇 사람은 경비대대장 이광노중령(종13합기·중장예편)을 비롯, 김신배소령(육사12기·현역 소장) 정동호대위 (육사13기·현역 소장) 신우식대위(육사14기·현역 소장) 안현태중위(육사17기· 현역 준장) 장종원소령 (통역14기·현역 준장) 김태섭중위 (육사17기·현역 준장) 등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예군인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장종원장군은 스케이트 국가대표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을만큼 만능 스포츠맨이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팔방미인으로 통했었다.
비둘기부대의 참모진은 참모장에 송택구대령 (육사8기·대령예편) ,인사참모에 김린태중령 (대령예편) ,정보참모에 이근식해병중령(해병간부3기·대령예편) ,작전참모에 김의향중령 (대령예편) ,군수참모에 권정달중령 (대령예편·현농수산부 비상계획관) 등이 임명됐었다.
한편 조장군이 비둘기부대장으로 임명되던 날 국방부에는『합참작전국장 손희선장군 월남에서 피격』이라는 외신보도가 날아들어 이를 확인하느라 한때 큰 소동을 빚었다.
손희선장군 (육사2기·소장예편·현흥창물산 상임고문) 과 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 이용장군 (육사5기·소장예편·전인천제철사장) 은 이훈섭장군 일행의 선발대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1월25일 월남에 파견됐었다.
1월26일 손장군과 이장군이 주월미군사령부에서 미군수뇌들과 회담을 마치고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을때 미군사령부 회의실이 폭파되었던 것이다. 외신과 일본신문들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손장군이 피습됐다고 오보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손장군은 귀국하여 기자회견끼지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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