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선 "양보없다" 끝까지 원칙지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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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00년 영국 농민들과 트럭 운전사들은 반 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공통된 불만, 즉 기름에 붙는 세금이 너무 높다는 공감 때문이었다. 유류세가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노동당 토니 블레어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보수당 정권이 부족한 세원을 마련하기 위해 손쉬운 간접세를 올려놓은 탓이다. 그 결과 2000년 당시 산유국인 영국 기름값의 70%가 세금이었다.

농민들의 경우 특별히 싼 기름(붉은색 디젤)을 공급받았지만, 그나마도 광우병 파동으로 수척해진 농민들에겐 무겁게 느껴졌다. 트럭 운전사들 역시 기름값 부담에 허덕이던 중이었다. 이들은 농기구와 트럭을 몰고 나와 거북이 운행을 하기도 했다. 시위 현장은 저절로, 서서히 달궈졌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노동당 출신이면서도 원칙을 강조했다. 2000년 7월 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기름값이 얼마나 비싼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경영의 과정에선 불가피하게 인기 없는 정책을 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무관심과 원칙 고수에 화가 난 시위대들의 분노는 들끓었다. 정유소를 봉쇄하고 유조차의 출입을 막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기름이 바닥나자 국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블레어 총리는 늦었지만 문제해결에 적극 나섰다. 정유업자들을 총리실로 불러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매일 수차례의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총리는 정유업과 운송업계의 난맥상을 파악하게 됐으며, 보수당 정권의 세제가 남긴 문제점도 확인했다.

결국은 민심이 블레어의 손을 들어주었다. 석유 공급이 떨어져 수술을 취소할 수밖에 없게 된 한 병원 의사가 시위현장을 찾아 "당신들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항의했다.

블레어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TV에 출연해 의료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라"고 지시했다. 본인도 직접 저녁 뉴스에 출연해 '국가적 위기'를 강조했다. "어떤 정부든 이런 식의 시위에 양보하거나 굴복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거듭 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서 파악된 문제점은 개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시위대들은 "60일 내에 유류세를 인하하라"는 조건을 내걸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시위대의 요구에 따를 수 없다. 세율조정은 연말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검토할 사안"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리고 다음해 초 유류세를 3% 내리고 화물차와 소형차에 대한 자동차세도 낮췄다.

오병상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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