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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제79화 육사졸업생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신임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대장은 한국군의 증강을 구상, 우선 중견장교들의 미국유학을 실현시켰다.
군인들이 전쟁중에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그만큼 미군지휘관들의 생각은 깊었던 것 같다.
사관생도를 전선에 투입해서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보자는 생각과 전쟁중이지만 여유를 갖고 장교의 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과의 차이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세상의 종말이 내일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데가 있다고 하겠다.
51년9월12일 하오4시. 부산항 미군전용부두에는 일본 자세보로 떠나는 일본선적의 군수물자 수송선 곤고 마루 (금강구) 가 출항준비를 끝냈다는 신호로 뱃고동을 서너번 크게 울리고 있었다.
미육군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입교할 1차 도미 유학생 1백65명은 부두에서 간단한 환송식을 가진뒤 이기붕국방부장관과 육군교육총감 이형근소장에게 출국신고를 끝내고 금강구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미보병학교 1차유학생은 6,7,8,9,10기생 중에서 시험을 거쳐 선발했는데 10기생이 54이나 합격했었다.
보스턴 백과 군용 더블 백을 들고 승선하는 위관장교들 가운데는 6기생 박보식, 8기생 김비· 길전식, 9기생 강상욱대위도 보였다.
부산항을 출항한 금강구은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13일 새벽5시 자세보에 입항했다.
자세보 미해군기지 안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유학생들은 이날 하오5시 미군수송선 재너럴 존 포프호에 옮겨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12일간의 긴 항해를 시작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파도가 심하다는 태평양을 무사히 통과할수 있을까, 6개월동안 김치를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고 한다.
유학생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것이 수세식 변소였다. 미군들은 변소에 들어가더라도 밖에서 다리를 볼수가 있는데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흑인 사병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것이다. 아예 변기 위로 올라앉았기 때문에 밖에서 다리가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9월 24일 상오 10시 제너럴 존 포프호는 드디어 샌프란시스코항에 닿았다.
채항석대위 (소장 예련 수산개발공사사장) 의 일기장에는 『한국인이 몇사람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시의 웅대함과 골든 게이트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상륙 수속이 끝나자 상항시내를 한바퀴 돈 다음 오클랜드에 가서 일로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라고 적혀 있었다.
10기생들은 사관생도시절 매일 매일 수양록을 써 내던 습관이 몸에 젖어 지금까지도 일기를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미보병학교 유학은 7차까지 계속되었지만 1차로 유학길에 오른 10기생중 황영시 소준열 김윤호 강영식 채항석 변일현 김해창 (소장예편 한국소방검정공사사장) 권익검 이경률(소장예편·울산석유감사) 고성룡 김명수 윤성중 김재명 성종호 손효신(준장예편 아세아중석부회장)김완주 황규만 (준장 예편· 대한선박사장) 이은직 김강섭 신위영(준장예편·대한보험공사이사) 김찬륜 한민석 배성순(준장예편·농협중앙회이사)씨 등은 모두 장성으로 진급됐으나, 오욱환(대령예편) 황두연 (대령예편) 이준화(중령) 홍양운 (대령예편) 강중묵 (소령) 씨등은 별을 따지 못하고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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