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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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P]

‘신중한 개혁가’로 불려온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23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91세.

사우디 왕실은 국영TV를 통해 방송된 성명을 통해 이날 오전 지난해 12월 31일 폐감염으로 리야드의 킹 압둘아지즈 병원에 입원한 압둘라 국왕이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중동의 맹주 자리를 놓고 이란과 경쟁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최고 지도자의 사망으로 지역내 불안정 요소가 또 하나 늘어났다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미국의 긴밀한 동맹국이자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이며 18억 무슬림의 성지인 메카·메디나를 통치하는 사우디 왕실은 왕위 계승을 신속히 발표했다. 압둘라 국왕의 동생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81) 왕세제가 직접 TV 성명을 통해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많은 도전을 함께 헤쳐왔다. 나는 항상 압둘라 국왕의 관점을 존중했고 우리의 진실되고 따뜻한 우정에 감사해왔다”며 “지도자로서 그는 항상 진실됐고 신념을 위한 용기를 갖고 있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압둘라 국왕은 출신과 지정학에 힘입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왕으로 군림했다. 세계 5위 원유 매장국 통치자였던 그는 풍부한 오일 머니로 사우디 사회를 변화시켰다.

1924년 리야드에서 태어난 압둘라 국왕은 초대 국왕인 압둘 아지즈의 13번째 아들이자 5대 국왕 파드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선친은 모두 22명의 부인을 거느렸다. 압둘라 국왕은 95년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왕세제로 섭정에 올랐다. 2005년 8월 파드 국왕이 서거하자 왕에 즉위했다. 그는 훨씬 이른 1962년 국방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래 군권을 장악해왔다.

그는 젊은 시절을 왕실이 아닌 천막 생활을 하는 베두인 부족과 생활했다. 이 때 익힌 격의없는 생활을 선호했다. 왕실에서 ‘폐하(your majesty)’라는 호칭을 없앴고, 왕의 손에 입맞추는 의전을 폐지시켰다. 7000명에 이르는 왕자와 공주에게 주던 수당도 삭감했다. 압둘라 국왕은 사막의 관습을 현대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통치를 이어갔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시민들이 직접 불만을 표시하도록 했다. 2010년 튀니지부터 ‘아랍의 봄’이 시작되면서 중동에 민주주의를 권장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최소 두 번 이상의 전화를 걸어 발언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자국 내 반정부 행동에는 철저한 무관용 정책을 취했다.

압둘라 국왕은 여성이 수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여성을 차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125억 달러를 기부해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 대학을 세웠으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2005년 10월 즉위 후 미국 ABC 뉴스의 바바라 월터스와 가진 첫 TV 인터뷰에서 말한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겠다는 약속은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2005년 집권 첫 해에 사우디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선거를 통해 지방행정자문회의 위원 592명을 선출했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을 약속했으나 수 차례 연기된 끝에 2015년 실시를 약속한 상태다.

압둘라 국왕의 가장 큰 업적은 수 만 명의 사우디 청년을 서구 대학에 국비로 유학시킨 정책이다. 유학 후 귀국한 이들은 국내 보수 세력을 견제하는 왕의 지원군이 됐다.

압둘라에게 가장 큰 도전은 2001년 9·11 테러였다. 당시 19명의 여객기 유괴범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인으로 밝혀지자 그는 과격분자에 대한 가차없는 소탕작전에 나서면서 알카에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압둘라 국왕의 사망 소식에 국제유가가 반짝 급등했다. 22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의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시간외 거래에서 3.1% 치솟았다. 북해산 브렌트유는 장마감 이전과 같은 배럴당 49달러를 유지했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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