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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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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얘기가 곁가지로 나간 김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야겠다. 구십 년대 중반쯤 내가 공주에서 징역 살 때의 일인데 화가 홍성담이가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다녀가곤 했다. 하루는 그가 와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무렵에 처음으로 광주 비엔날레가 시작되어 구경꾼들이 광주로 몰려들 때인데 광주시 북구청장 노릇을 하고 있던 김태홍이가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을 불러 술 한잔을 샀다고. 김태홍이는 기자협회장을 하다가 5공 때 수배당하여 주위 사람들 특히 방배추 형이 남영동 이근안에게 곤욕을 치르도록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러고는 '말'지에 언론통제 내역을 폭로하여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었다. 신문사 이사 노릇을 하더니 때려치우고 아마도 그맘때 광주에서 구청장 노릇하며 정치 견습 중이었을 것이다. 김태홍이가 우리 앞에서는 제대로 말을 못해도 딴에는 한 구라 한다고 좌중을 모아 놓고 제법 웃기는 때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시간을 길게 잡고 죽치고 앉아서 이야기를 쌓아 가면서 분위기를 점진적으로 높여 가는 형이었다. 그리고 재담의 상대로 좌중에 꼭 희생자가 하나 있어야만 했다. 언제나 그 적격자가 소설가 송기숙이었는데 김태홍이 아무리 죽사발을 만들어도 송기숙은 눈이 감기도록 가늘게 뜨고 호인다운 웃음만 웃을 뿐이었다. 그도 한 가락 하는데 그저 져주는 것인지. 모처럼 광주에서 여럿이 모여 앉아 주흥이 무르익는데 염무웅이 배추 형을 일부러 자극하느라고 한마디 찔렀다.

- 세상에서 지금 조선의 삼대 구라는 모두 갔다고 그럽디다.

사실은 자극하여 오랜만에 배추 형의 '라디오'를 듣자는 것이었는데 배추 형은 자극받기는커녕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리여?

- 그렇잖아요? 백기완 선생은 민중 대통령 후보 노릇하고 완전히 갔고, 황석영이는 옥에 갇혀 있으니 당연히 갔고, 형님도 이젠 늙었으니 한물간 거지요. 지금 중원으로 신흥 구라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그래애? 그럼 맨 앞장서서 달려오는 신흥 라지오가 누군지 말해 봐라.

해방 전 세대들은 얘기꾼들을 일컬어 '라지오'라고 칭했다. 염무웅은 당시에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이의 이름을 댔다.

- 걔가 요즈음 만만치 않습니다.

배추 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픽 웃더니 대답하더란다.

- 얀마, 걔가 인생이 없는데 무슨 라지오냐? 그건 교육방송이지.

그래서 유홍준이 교육방송이 되어 버린 이후에 나름대로 '조선의 3대 교육방송'이 새로 생겨나게 된다. 강론의 마술사라고 하는 이어령과 한문 잘 아는 김용옥이 함께 분류되었는데 이건 순전히 배추 형의 '라지오'론 이후부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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