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배냇저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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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난히도 따사로운 어느 한낮에 아침 설거지를 마친 나는 풍선처럼 부푼 배를 어루만지며 이제 곧 태어날 우리아기의 꿈이나 꿀까 하고 낮잠을 자려고 마루에 누웠는데, 안방에 계시던 시할머님께서 조그마한 신문뭉치를 들고 나오시어 내 앞에 내려 놓으셨다. 궁금한 마음에 살며시 펼쳐본 신문속에는 얼른 봐선 때묻은 광목조각 같은 것이었지만, 아주 조그마한 융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할머니, 이것 어디서 가져오셨어요?』하고 철없이 떠들어대니, 그제서야 시할머님께선『얘, 그것은 27년전 네 남편이 세상에 갓나서 입었던 배냇저고리란다』하셨다.
그러자 내 입은 딱 벌어진 채 목이 메어 말이 안나오고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자를 위해 손수 지으신 그것을 아들을 따라 오랫동안 지방을 옮겨 다니시면서도 늘 당신 곁에 간직해 두셨다니, 손자며느리로서, 또 요즈음 젊은 새댁의 한사람으로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 아니라 그 자상하신 사랑과 여유를 나 또한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모레면 멀리 제주농장에서 올라오실 시어머님의 미소띤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저고리를 새하얗게 빨아 삶아서 마당 빨랫줄에 널어놓고 행여 더러워질세라 눈처럼 날아드는 수양버들 꽃가루를 쫓으며 하루해를 보냈다.
그후 며칠이 지나 기다리던 시어머님이 서울에 도착하시고 때맞춰 우리의 공주도 태어나 나는 드디어 엄마가 되었다.
야멸치게 울어대는 아기의 볼기짝을 내리치며『햐, 넌 정말 행운아구나. 부럽다』고 하며 사랑스런 그이의, 그리고 아기의 저고리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 해일처럼 밀려오던 그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때 땀에 흠뻑 젖은 나의 이마 위에 시어머님의 뜨거운 볼이 포근히 와 닿아, 다시 한번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아!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구나』-. 착한 며느리, 현명한 아내와 엄마가 될 것을 맹세하며 시어머님의 손을 더듬어 잡은 두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안경주<서울 강남구 방배2동 524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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