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운전기사 내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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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간밤을 뜬눈으로 하얗게 새우고 물 한 컵으로 목을 축이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거의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김명인씨 댁인가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네 접니다. 누구신가요..』 흥분과 기대로 막 떨려오는 몸과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되물었다.『어젯밤 저희 택시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더군요. 보관하고 있으니….」 순간 정신이 번쩍 나고 온 몸에 힘이 솟는다. 큰 소리로 『네. 정말 고맙구료. 고압구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수유리 친구 집에 잔치준비 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오며 택시를 탔는데, 어찌나 피곤한지 줄곧 졸며 왔고 내릴 때 깜박 가방 한 개를 놓고 내린 것이다. 일을 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또 한 개의 가방에 아들내외의 패물 모두와 통장 등 귀중품이라 생각되는 것은 모조리 챙겨들고 다녔던 것이다. 맞벌이하는 아들내외가 집에 두기 불안하다며 철석같이 믿고 맡긴 그것들을 몽땅 잃어버렸을 땐 그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밤새 실성한 사람처럼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안절부절 못했었는데.
택시운전기사의 부인과 통화를 끝낸 나는 겨우 세수만 하고 약속장소로 급히 갔다. 내내 조바심하며 택시로 30여분 달려서 신림동 ○○내과 앞에 다다랐을 때, 그곳엔 노란 띠로 아기를 업은 기사의 아내가 구세주처럼 서있었다. 또 한차례 수없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녀를 따라 그들이 살고있는 집으로 향했다. 두 평 남짓한 셋방으로 부엌을 통해 들어서던 나는 그만 울고 싶었다.
그곳엔 분명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아름다운 마음 이상의 어떤 감격적인 분위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어려운 처지의 그들에겐 더 더욱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와의 통화를 위해 새벽부터 공중전화 앞에서 나의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를 돌려가며 애썼던 것이다.
고마운 나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자 끝내 사양하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하며 선하게 웃던 기사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리며 새삼스레 좀 더 오래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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