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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중공 스포츠 접촉|중공, 80년대 들어 적대감 해소 우호적|경기장 안팎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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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과 중공이 양국 간의 소원했던 관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잦은 접촉을 가졌던 분야는 단연 스포츠가 앞선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상호교류」의 형태가 아니었고 두 나라가 함께 참가하는 제3국에서의 국제대회를 통해서였다. 그나마 시기 또한 70년대 이후로 압축된다.

<70년대까지는 냉담>
중공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기인 탁구종목 하나를 제외하고는 해외무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과 중공의 스포츠 첫 대면 역시 탁구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56년3월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중공과 처음 만났던 한국은 당시 세계수준에 크게 뒤떨어져 있던 중공을 3-1로 격파하여 그들에게 『탁구를 국기로 삼고있는 중공보다 더 강한 한국』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59년 서독 도르트문트에서의 제25회 대회에서도 한국은 중공과 여자단체전 준결승에서 부딪쳤으나 3-0, 일방적인 스코어로 물리쳤다. 이후 10여년 동안은 탁구에서조차 한-중공간의 경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공은 두 번씩이나 한국에 고배를 마셨으나 70년12월 스칸디나비아 오픈탁구대회(스웨덴)에 나타난 모습은 과거의 중공이 아니었다. 한국은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3-0으로 완패, 우승의 영광을 중공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처럼 탁구, 그것도 여자경기를 통해서만 몇 차례 접촉을 가졌던 양국은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7회)에서부터 모든 종목에서 기량을 겨루게 됐다.
중공은 57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복귀한데 이어 74년에는 AGF(아시아경기연맹)에도 가입, 정치적 영향력 못지 않게 스포츠 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경세탁서 첫 대면>
이 대회에서 한국은 1백78명의 선수가 금16, 은26, 동메달 15개를 얻어 2백66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32, 은47, 동27로 3위를 차지한 중공에 밀려나 종합4위를 기록했다.
한국과 중공은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6개 종목의 단체경기로 대결, 농구·배구·테니스는 한국이, 탁구·배드민턴·펜싱은 중공이 각각 우세를 보였다.
이 무렵 한국선수단을 대하는 중공임원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북한과 대동소이했으나 경기매너만큼은 깨끗했다. 떼거지와 횡포를 일삼던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중공의 세련된 매너는 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더욱 빛나 보였다. 농구경기장에서 한국과 중공응원단이 서로 국기를 바꾸어 선수들을 격려했다.
공식적인 입장에 있는 선수나 임원들과는 달리 응원에 나선 민간인들이나 외교관들에게서는 적대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70년대 전체를 놓고 볼 때 중공체육인들의 우리에 대한 태도는 냉담으로 일관됐다.
이런 면에서의 커다란 변화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80년9월 홍콩 아시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중공을 91-68로 크게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중공은 당초 이 대회 우승을 자신하여 한국과의 결승전 경기를 중공 스포츠사상 처음으로 위성중계로 컬러 생방영했으나 무릎을 꿇는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페넌트 교환 제의도>
그러나 중공임원들은 이 같은 패배의 쓰라림에도 정치적인 적대감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중공팀 부단장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한국팀주장 강현숙 선수를 경기장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훌륭한 경기를 앞으로 볼 수 없게돼 섭섭하다. 결혼하게 됐다니 행복한 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깍듯한 인사말을 건넬 정도였다.
이듬해 같은 곳에서 열린 아시아 남자농구대회에서는 중공팀이 처음으로 페넌트 교환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유치에 성공하면서 중공체육인의 우리에 대한 태도는 더욱 우호적으로 나타났다.
82년 12월 뉴델리 AGF 총회에서 아시안게임 서울 개최가 만장일치로 결정된 후 한국 대표들은 현지에서 자축 리셉션을 베풀었다. AGF 전체회원국이 참석한 이 자리에 북한측은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며 억지를 써 불참했으나 중공은 차진량 IOC위원이 직접 나와 우리측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82년 11월 뉴델리의 제9회 아시안게임 때에는 선수촌이나 경기장 안팎에서 양측의 임원·선수·기자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려 환담하고 함께 술잔을 나누기까지 했다.
AFC(아시아축구연맹) 총회 집행위원국 선임에서 한국은 중공의 추천을 받아 피선됐다. 한국은 당초 집행위 후보국에서 빠져있었으나 중공 대표가 마지막 순간에 이를 수정, 통과시킨 것이다.
물론 중공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북한을 비호하는 정치적 자세도 함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82년 북경이 유치한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대회는 한국의 출전을 억지로 막을 수 없게되자 결국 대회를 반납, 스페인에서 개최됐다. 또 82넌 9월 서울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간 중 열린 아시아야구연맹 총회에 중공은 일본을 통해 위명 중공야구연맹 회장을 대표로 참가한다고 통보했으나 막바지에 이르러 태도를 바꾸었다.

<아직까진 북괴의식>
이런 일련의 상황은 중공이 여전히 북한의 눈치를 보고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중공 스포츠교류는 머지않아 전격적으로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중공은 FIFA(국제축구연맹)가 창설한 85년 제1회 세계주니어축구선수권대회 주최국으로 선정돼있고 한국이 아시아 지역대표 3개국에 끼는 것은 거의 확실해 한국선수단의 첫 중공입국이 실현될 수 있고 이에 앞서 이 대회 지역대표 선발전까지 중공이 유치할 움직임이어서 그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또 지난해 ABC(아시아농구연맹) 총회에서 84년 제12회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를 유치한 한국측에 중공은 『오는 11월 홍콩 총회에서 참가여부를 결정, 회답하겠다』고 약속한바 있어 중공팀의 첫 방한도 실현가능성이 있다.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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