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만주의 심양은 이래저래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곳인가 보다. 심양에서 상해로 가던 중공 여객기가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으로 이 도시가 최근 우리의 관심을 일깨운바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역사를 보면 심양은 바로 조선을 눌러 굴복시킨 근거지로 등장한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 심양에 10만 대군을 모아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이른바 조선친정이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가는 길이 막혀 수구문을 거쳐 광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40여일의 포위속에서 왕도 침구 없이 잘 정도였다니 그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드디어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에 인조도 항복을 결심했다.
1637년(인조 15년)1월30일, 왕은 9층 수강단에 버티고 앉은 청태종 앞에 삼배구고두(절을 세 번하고 이마를 아홉 번 조아리는 것)의 예를 행하고 「만성호곡」속에 이른바 성하지맹을 맺었다.
항복식이 거행된 곳이 바로 한강 나루터 삼전도(지금의 강동구 송파동). 이곳엔 2년 후 청장 마부태의 지휘로 「청태종 공덕비」가 세워졌다.
비의 문장은 이조판서 이경석이 썼고 글씨는 오준이 새겨 넣었다. 내용은 청이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부득이 항복한 사실, 청황제는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것 등이다.
이 비는 당연히 민족적 수치의 대상이 돼 1895년 일시 곤몰한 적이 있고, 1956년에도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땅에 묻은 적이 있다.
그 후 원위치에서 약간 옮겨 세워졌으며 지금은 사적 l0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비석을 보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 비록 국치의 증거물이긴 하나 거북 등위에 올라선 웅혼정교한 석공예술이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는 것.
또 한가지는 국치의 현장이라도 원형대로 보전해 후세의 교육 자료로 삶아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최근 인조의 항복 장면을 새긴 조각이 설치되리라 한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삼전도비 자체가 천 마디, 만 마디를 말해 주는데 꿇어앉은 조선 국왕이 무엇이 자랑스럽다고 조각으로 새겨 후세에 전하러 할까.
수난의 현장을 보존하자는 것은 「이왕 있는 역사적 기록물」을 훼손하지 말자는 뜻이지 「없는 수난의 현장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난의 현장을 조각으로 남기자면 우리 국토는 아마 통곡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보다 나쁘다』는 말처럼 역사를 보는 균형감각을 찾을 때다. 역사의 좋은 면은 부각시키되, 나쁜 면은 침전시키는 것이 국민의 기상을 진작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