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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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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한용운의 시 '복종'의 일부분이다. 애국심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자발적 복종'은 철학과 정치학의 오랜 관심사였다. 신이 아닌 대상에 인간이 스스로 예속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자발적 복종이란 말은 플라톤의 '향연'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을 주제로 한 첫 논문은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에티엔 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박설호 옮김, 울력)이다. 그는 18세 때 쓰고 친구인 몽테뉴가 격찬한 그 책에서 폭정과 독재를 비난하고 자발적 복종이 그것들을 키운다고 역설했다.

무정부주의적이기까지 한 그의 사상은 이후 입맛에 따라 수정.첨삭되면서 마구잡이로 활용된다. 위그노 전쟁 당시 신교도들은 라 보에티의 책을 '독재자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재발간, 구교도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신교도 반란을 진압한 리슐리외는 그 책을 구하려고 권총 5자루 값을 치러야 했다. 프랑스 혁명 때도 '자발적 복종'은 혁명세력의 슬로건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라 보에티 사상은 유신 독재 시절 잠깐 고개를 드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다시 끄집어냈다.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 시대까지 왔는데 웬 자발적 복종인가 했더니,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이제 미국에 대해서다. 한국이 미국에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라 보에티에게서 조금 벗어나 있다. 민중을 늘 저항의 주체로만 파악하는 좌파 역사가들의 시각 탓이다.

마침 오늘은 한국전쟁에서 국군이 미군과 함께 38선을 돌파한 날이다. 독일이 45년 만에 통일을 이뤄낸 날이기도 하다. 미군 참전이 없었어야 한반도 통일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강 교수는 한국판 모세를 자처하는 듯하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깨어나라고 재차 꾸짖고 있다. 그가 인도할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대신 수백만 명이 기아로 쓰러지고 있는 땅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