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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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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범죄 처벌법은 우리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954년 제정 당시엔 난방용 집 굴뚝을 방치해도, 길거리에서 뱀을 팔아도 처벌하도록 했다. 사적으로 춤 교습을 하거나 극장 등에서 새치기를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63년 개정 땐 미신의 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다며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미신요법,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주는 과다 노출 등의 조항이 추가됐다.

73년엔 장발 단속과 유언비어가 더해졌다. 유언비어 조항은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한 도구로 자주 악용됐다. 70, 80년대 경찰관이 곤봉.가위.바리캉을 들고 장발족을 쫓아다니고,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을 잡아 세워 무릎 위로 30cm짜리 자를 들이대는 진풍경은 장발 단속과 과다 노출 조항이 단초였다. 장발 단속과 유언비어는 88년 삭제됐다. 과다 노출은 미니스커트에 이어 90년대 '배꼽티 단속' 논란을 불렀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경범죄 처벌법은 지금도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 2500원이던 범칙금은 89년 두 배 인상됐고, 91년에는 여섯 배나 뛰었다. 현재는 10만원이다. 하지만 현행 54개 조항 중에는 사문화된 게 많다. 굴뚝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춤은 더 이상 퇴폐문화를 상징하지 않는다. 뱀을 파는 노점상도 없다.

처벌 조항도 아주 애매하다. 불안감 조성, 요부조자(要扶助者.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등 신고 불이행 등의 위반 여부가 그렇다. 청객(請客)행위 조항을 들이대면 호객행위로 손님을 끌어 모으는 시장 상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엿장수 맘대로'식으로 법 적용이 가능하다.

경찰청이 경범죄 처벌법의 전면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조항이 많고 전과자를 양산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지난 한 해 119만여 명이 법을 위반했다.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등장한다. 여인숙 주인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침대를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는 침대보다 키가 큰 손님은 다리를 절단하고, 반대의 경우엔 다리를 잡아 늘였다. 낡은 경범죄 처벌법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