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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통신] 원전 위험지대 주민들에게 배달된 알약의 정체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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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스위스 정부가 원전 반경 50㎞ 이내 사는 주민들에게 보낸 요오드화칼륨 정제. 스위스에 원전이 자리 잡은 곳과 이번에 요오드화칼륨 정제가 분배된 지역. 국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 . [스위스 에너지부]

얼마 전 집으로 안내문 한 장이 왔습니다. “이것은 정부의 공식 통지문입니다. 이것을 받는 건 당신이 원전사고 위험지대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 있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조만간 요오드화칼륨(potassium iodide·KI)정제가 각 가족 구성원 앞으로 배달될 것입니다. 정부의 안내가 있기 전까지는 약상자를 열지 마시고,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상온의 장소에 보관하십시오.”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한 이 안내문이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과연 알약 세 상자가 도착했습니다. 저와 남편은 물론 세 살배기 딸 몫까지요. 알약상자 안에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설명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유출된 방사선이 호흡기를 통해 갑상샘에 축적되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 요오드화칼륨을 섭취하는 것은 그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피폭을 막을 수는 없으며 유사시 정부 안내에 따라 건물 지하실 등으로 대피해야 한다’.

 방사능 누출에 대비한 거라니 불안에 떨어야 하나, 아니면 약을 받았으니 안심을 해야 하나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전까진 스위스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 몇 군데나 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죠. 부랴부랴 검색을 해 봤습니다.

 스위스에는 1969년에 세워진 베츠나우 1호기부터 84년 가동을 시작한 라이프슈타트 발전소까지 원자로가 총 5기 있습니다. 국가 전체 전력 소비량의 39%(겨울철엔 45%)가 이곳에서 생산되는데, 이는 유럽 평균(33%)을 한참 웃도는 수치입니다.

 원전이 에너지 수급에 기여하는 비중이 이렇게 큰데도 스위스 정부는 안전성 홍보보다는 위험성과 대비책을 더 강조하는 모양새입니다. 요오드화칼륨을 나눠 주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정부가 산정한 가상의 위험지대는 원래 발전소로부터 반경 20㎞였는데, 2014년부터는 그 거리를 50㎞로 확장했습니다. 워낙 작은 나라다 보니 수도 베른과 최대 도시 취리히도 위험지대에 속하죠. 정부는 사후 대비책만 내놓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탈원전 움직임도 주도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2011년 3월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에너지부 장관은 진행 중이던 새 원전 건설을 즉시 중지했고, 사고 두 달 뒤인 2011년 5월엔 가동 중인 원자로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새것으로 대체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베츠나우 원자로를 2019년 폐기하는 걸 시작으로 2034년까지 모든 원전을 없애겠다는 계획이었죠.

 물론 이게 말처럼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원전 폐기 비용만 해도 정부 추산 최대 38억 스위스프랑(약 4조2500억원)이고, 대체재인 화석연료 사용이 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200만t까지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저렴한 전력 공급원인 원전을 폐기할 경우 전기료가 오를 것을 우려하는 국민도 많습니다. 최근 베른에서 치러진 주민 투표가 이를 반영합니다. 베른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는 뮐레베르크 원전의 수명을 줄여 빨리 없애자는 내용의 투표였는데, 63%가 반대표를 던져 이 원전은 2019년까지 계속 가동을 하게 됐습니다.

 장기적인 해결방안은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스위스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정책이 ‘미네르기(Minergie·에너지 절약형) 건축’입니다. 단열재와 자연 채광, 건물 내 환기 시스템 등을 이용한 미네르기 건축물은 일반 건물에 비해 건축 비용이 15%가량 비싸지만 소비 에너지 비용은 60%까지 줄어듭니다. 멀리 보면 더 이익이란 겁니다. 98년 이 정책이 시작된 이래 스위스 전역에서 1만5000채 이상의 건축물이 미네르기 승인을 받았습니다. 현재 신축은 13%, 재건축은 2%가 미네르기 설계를 따르고 있죠.

 한국은 어떤 상황인가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따르면 현재 가동 중인 원전만 23곳, 건설 중인 곳이 5곳입니다. 스위스의 대여섯 배 규모지만 안전대책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대책은커녕 기밀 문서인 내부 도면이 잇따라 유출돼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못 잡는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에 대한 기대는 할 수도 없고요. 약 8000곳 이상의 스위스 기업을 대변하고 있는 스위스 재생에너지협회는 정부의 탈원전 계획에 대해 ‘groundbreaking(획기적인)’ 결단이라는 논평을 냈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지금이라도 획기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땅(ground) 밑이 꺼질지도(breaking) 모를 일입니다.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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