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140> 자유당과 내각(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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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유당의 이기붕시대는 족청의 거세에서 그 길이 열려갔다. 그 때문인지 족청의 거세는 이박사가 족청의 세력성장을 경계해서 내린 조처라는것이 정세처럼 되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신두영씨도 그런분들중의 한사람이다.

<한때 족청계중용>
『족청계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범석계를 뜻하는 말이다.「족청12인조」소리를 듣던 사람중 족청출신은 김재능씨 정도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족청의 청년운동과는 무관했다. 따라서 이들 모두를 족청계라고 하는것은 잘못된 얘기다. 이범석계라는것도 이범석씨 자신이 직접지휘한것은 아니었고 이박사에 가까우면서 이범석씨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그런 명분으로 정치활동을 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밖에서 족청계를 대단한 정치세력으로 평가하고 말들이 많았지만 이박사 자신은 족청을 대수롭게 어기지 않았다. 흔히 족청계 거세는 족청세력이 너무 커지니까 이박사가 경계한 나머지 취한 조처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신두영씨의 얘기다. 사실 족청의 성쇠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박사가 족청을 경계한 흔적은 별로없다.
52년의 부산정치파동후 족청은 몰리는 입장이었다. 밖에선 야당이, 안에선 이박사 측근과 자유당 원내파들이 집요한 파상공세를 펐다.
이박사가 부통령으로 이범석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본 이유중의 하나도 이런 정치기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족청계가 반대파에 대해 공세를 취한것은 정부통령직접선거가 끝난직후부터다. 선거 직후인 9월26일 부산에서 열린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족청계는 이범석의 부통령당선을 방해한 이활계를 숙청하라고 결의했다.
그 결의에 따라 28일의 중앙위원 전형에서 족청계는 이활의 국민회계를 대거 탈락시켰다. 내각에 대한 공세도 병행되어 장택상총리를 축출하는데도 성공했다.
마침 이박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족청을 중용해 내각은 백두진총리서리, 진헌직내무, 이재형상공등 족청우위가 되었다. 그랬지만 자유당 중앙당부는 반드시 족청이 우세한것은 아니었다. 촉청의 반대파에 대한 총공세는 53년에 시작되었다.
53년5월10일 대전에서 열린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족청계열은 반대파 제거의 칼을 뽑았다. 지방대의원의 우위를 이용해 족청계가 주도하는 「반당불순분자 징계위원회」, 그리고 중앙위원과 중앙당부차장을 선임할「자유당21인 보강위원회」를 구성했다. 자유당의 중앙당부를 장악하기위한 족청계의 포진이었다.
이때 족청이 거세하기로 한 대상은 족청계 공세에 앞장섰던 반대파들-국회의 김종회 이진수 조경규 오성환,그리고 사회단체계열인 채규항 유화청 이활 유지원등이었다.
비족청계도 방어에 나섰다. 삼우장파로 불리던 이갑성 설은포그룹이 비족청계에 가세했다. 자유당을 뒤흔드는 거대한 바람이었다.
이때 이박사는 자유당의 총재로서 이 다툼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6·25행사때 실언>
이대통령은 대전대회 폐회직전 유시를 통해 지금까지의 파벌싸움은 묵인하겠으나 앞으로는 용납치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앙당부차장은 보강위에서 전형하여 선정하지말고 중앙위에서 선정하여 총재의 재가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신형식사건이란 청주에서 있었던6·25 2주년행사에서 연설도중 이범석장군이라고 해야할 대목에서 김일성운운하는 실언을 했다해서 구속된것을 말한다.
족청계는 대통령의 지시로 얼마간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숙당을 밀어붙였다. 비족청계도 완강하게 맞섰다. 이런 암투에서 족청이 몰리기 시작한것은 이른바 신형식사건에서 부터다. 자유당의「반당불순분자 징계위원회」위원장이던 신형식은 청주에서 있었던 6·25 2주년행사 연설도중 김일성을 찬양하는 실언이 있었다해서 구속.
올해 73세로 향리에서 은거하고있는 신형직씨의 회고.
『51년 자유당 창당때 참여했다. 당시 이박사는 자유당 창당에 나서면서 국민회등 외곽단체 간부들을 도지사로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자유당 창당을 돕도록 했었다.

<함태영밀어 당황>
이때 지사로 발탁된 이가 이명구 (충북) 진헌식 (충남) 이을식 (전남)김영기 (경기) 씨등이다. 당시 나는 국민회 충북부위원장을 맡고있었는데 이명구 지사가 자유당 참여를 권했다.
이지사는 내게<신군, 이제부터는 국민회의 일보다 당만드는 일을 해주어야겠어. 이박사의 분부니 자네가 맡아주어야지>라고했다. 이지사는<금년안에 창당할테니 서두르라>면서 조직비용으로 20만원을 주었다. 이렇게해서 나는 자유당 창당 멤버가되었다. 나는 국민회에 참여하기전 족청활동도 했다.
나는 8·15후 근로인민당 충북도당위원장으로 있다가 당수 여운형씨가 암살당한뒤 탈당하고 46년 봄 족청에 참여했다. 그랬지만 당시는 코뮤니즘과 소시얼리즘의 구분이 없이 진보파들을 싸잡아 빨갱이로 통칭하던때라 내게도 빨갱이라는 딱지가 따라다녔다.
족청은「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것 외에는 정치성을 배격했고 그래서 나같은 경력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극우파에선 족청을 가리켜「전향자집단」이니「기회주의자」니 하는 비난들을했다. 나도 이런 경력이 나중에 화근이 되지만 어쨌든 자유당에 참여해 핵심에 다가간것이 화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지사의 당부를받은 나는 충북도내 각군의 청년단·국민회등 간부들을 끌어모아 자유당 창당작업을했고 창당대회에도 참여했다. 자유당창당후 청년단출신들이 혼란에 빠진것은 이박사가 함태영씨를 부통령으로 밀었을 때다. 선거일 1주일을 앞두고 경찰의 공작을 알게되었을 때는 몹시 당황했다.
우리로선 이범석못지않게 이박사에 대한 지지열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때 세간에서는 족청타도로 알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음 개각에서 족청계가 대거 입각하게돼 우리는 이범석을 후계자로 하는 포석으로 알고 새로운 용기를냈다.』<증언은 다음회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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