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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과 200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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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외환위기가 다가오던 1997년 가을. TV에 이런 뉴스가 나왔다. 재정경제원 외환담당 공무원들이 사무실에서 자장면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밤 늦게까지 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외환시장을 지키겠다"며 결연히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얼마 뒤 외환위기가 닥쳤다. 막판에 공무원 몇 사람이 밤을 새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외환위기는 95~96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97년 말 대선을 앞두고 정부는 물가 안정과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지키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96년 경상수지 적자가 기록적인 231억 달러에 달했으나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적자를 줄이려면 시장이 원하는 수준으로 원화 환율을 끌어올려 수출을 늘려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원화 환율이 오르면 물가가 상승하고, 1만 달러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원화 환율을 달러당 800원대에서 계속 눌렀다.

원화 환율을 제때 조절하지 못한 결과는 97년 말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환율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았다. 1만 달러도 허무하게 깨졌다. 1만 달러를 다시 회복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진작 대비했으면 공무원들이 자장면으로 저녁을 때우는 일도, 그해 겨울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 아픔도 없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얼마 전 자장면 뉴스와 비슷한 기사를 접했다. 공무원들이 8.31 부동산 대책을 만드느라 한 달간 합숙을 하며 고생했다는 내용이었다. "투기로부터 국민을 지켜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97년과 똑같았다.

과정도 비슷했다. 부동산 거품은 일찌감치 2001년 하반기에 시작됐다. 벤처 열풍의 후유증으로 경제가 주춤하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썼다.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를 석 달 새 1%포인트나 낮췄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시중에 넘치는 돈이 부동산으로 몰렸다. 분양시장은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곧바로 금리를 올려 돈줄을 적당히 조였으면 지금처럼 턱없는 부동산 거품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저금리 기조를 유지했다. 돈이 넘쳐도 기업이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마 2002년 말 대선을 앞두고 있어 돈줄을 조이는 모험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부동산 거품이라는 짐을 지고 2003년 현 정부가 들어섰다. 그때라도 바로잡아야 했으나 되레 금리를 더 내리고, 부동산을 자극하는 개발정책을 쏟아냈다. 부동산이 계속 오르자 정부는 세금으로 맞섰다.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댐에 물이 찼는데, 물은 빼지 않고 댐을 더 높이 쌓는 것과 같다. 정부도 모를 리 없었다. 재경부 내에서 회의론이 나왔으나 코드를 못 맞춘 엉뚱한 소리로 몰렸다.

몇 차례 대책이 효과가 없자 정부는 갈수록 강한 세금 카드를 들고 나왔다. 8.31 부동산 대책이 그 최종판이다. 공급대책을 곁들였지만 핵심은 세금이다. 막판에 몰린 정부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정부는 부동산 거품을 투기꾼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주된 원인은 4년간 계속된 저금리다. 돈이 넘치다 보니 부동산으로 흘러가고, 틈새를 파고드는 투기꾼도 생긴 것이다. 진작 돈줄을 조이고 주택 공급을 늘렸으면 집 없는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는 일도, 집 있는 사람들이 세금 걱정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금리 인상 얘기가 나오고 있다. 분명 부동자금을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선진국들이 금리를 계속 올리는데 우리만 가만있기도 어렵다. 하지만 금리를 올리기에는 여건이 더 나빠진 것 같다. 그동안 가계대출(468조원)이 너무 비대해졌다. 8.31 대책과 고유가로 내수가 위축된 점도 걸린다.

미국은 정책금리를 수시로 조정하며 물가와 경기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금리 조정 시기를 놓쳐 부작용만 안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 어렵게 됐다. 정책 실기(失機)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정부가 되새겼으면 한다.

고현곤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