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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두 점 접어주고 한 집 패배, 명인에겐 극도의 자부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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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호 26면

제4세(世) 혼인보(本因坊) 도사쿠의 고향인 일본 혼슈(本州) 시마네(島根)현에 보관돼 있는 도사쿠의 바둑판과 돌. [사진 일본기원]

바둑 역사상 최고의 기사는 누구일까. 도사쿠(道策·1645~1702)와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이다. 두 기사 모두 패러다임 혁명을 한 번 이뤄 반상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우칭위안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업적은 도사쿠가 크면 크지 못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이 글의 초점이 아니다. 오늘은 ‘명국의 기준’이 주제다.

<18> 명국의 조건

#1. 도사쿠가 자신의 명국으로 꼽은 게 하나 있다. 1683년 어성기(御城碁·쇼군(將軍) 앞에서 두던 공식 대국)에서 야스이 슌치(安井春知·1653~1689)와의 두 점 대국으로 한 집을 진 바둑이다. 도사쿠는 “슌치는 뛰어난 기사”라고 치켜세우면서 “그도 나도 역량을 다해 조금도 후회 없이 두었다”고 뒷날 돌아봤다. 기보를 보면 상변 백3에 이은 백5 세 칸 협공이 놀라운 발상이다. 일본 바둑 300년을 정초(定礎)한 수로 전개와 협공을 겸했다. 전개와 협공을 겸한 수는 고대 중국엔 없었다.

기보 백3, 백5가 도사쿠가 창안한 포석.

#2. 조와(丈和·1787~1847) 명인은 자신의 명국으로 내기꾼 시미야 요네조(四宮米藏·1769~1835)와 1821년에 둔 두 점 바둑을 꼽았다. 승부는 빅(무승부)이었다. 빅이 아니라 한 집을 졌다면 더욱 유쾌했을지도 모르겠다.

#3. 1913년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은 노자와 지쿠초(野澤竹朝·1881~1931) 5단과의 두 점 대국을 명국으로 꼽았다. 백으로 한 집을 이겼다. 객관적으로도 명국이었다. 흑도 잘 두었지만 백의 안목과 수읽기, 판단의 신랄함이 당대의 명인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4. 하나만 더 하자. ‘패국(敗局)의 묘수’로 알려진 대국이다.

걸물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1798~1859)가 오사카(大阪)에 머물던 1852년. 11월 17~23일 조와 명인의 문인 가쓰타 에이스케(勝田榮輔·?~?) 2단과 대국했다. 19일 흑이 묘수를 던져 중반의 우세를 점하자 인세키는 봉수(封手·대국을 중단하는 것)했다. “내일 두자.” 그날 밤 찾아온 손님에게 자만을 섞어 말했다. “내 묘수를 당해 질 바둑이나, 상대의 실력을 요량해본즉 내가 한 집은 이길 것이라….” 말을 맞추느라 그랬는지 바둑은 인세키가 한 집을 이기고 가쓰타는 돈이 다 털렸다. 가쓰타가 돌아가면서 한마디 했다. “내 그래도 묘수는 남겼다!” 인세키의 “한 집 이길 것이라” 운운은 도사쿠가 한 집 진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일본 바둑 300년의 기초를 닦은 도사쿠. 그는 실력 13단으로 불렸던 바둑의 기성(棋聖)이었다.

고금 통틀어 두 집 이긴 예 본 적 없어
실제 두 점 바둑에서 명국이 많이 등장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우연히 도사쿠가 그리 말했기에, 그 다음부터 두 점에서 한 집 정도 차이가 나오는 바둑이 있다면 도사쿠를 따라 하고 싶은 걸까. 가만 보면 이런 현상이 일본에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 초까지다. 한국과 중국에는 그런 현상이 없다. 문화적 이유일까. 아니면 바둑의 본질 때문일까. 고금에 묘한 현상의 하나다.

생각해 보자. 한 집 진 것, 또는 한 집 이긴 것이 초점인가. 아니면 두 점이 초점인가. 두 점을 먼저 생각하자. 바둑에서 두 점 바둑이란 말 그대로 흑이 돌 두 개를 반상에 먼저 깔고 대국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맞바둑과 달리 백이 먼저 둔다. 그러면 반상은 귀가 4개고 서로가 착수교대를 하기에 이리 된다. 두 점이라면 귀의 점거 비율이 1대3이 된다. 백 하나에 흑 세 개. 하지만 선(先·맞바둑이되 흑이 먼저 두는 것)이면 점거 비율이 2대2가 된다.

1대3과 2대2니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겠다. 하지만 과연 어떤 차이인가. 두 점이면 차이는 있지만 하수의 실력이 상수에 꽤 쫓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차이가 현격하다는 걸까. 참고로 20세기 이전엔 명인과 초단의 실력 차이는 석 점이었다. 프로 수준이 아니라면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둑 외적인 비유를 찾아볼까. 시인 서정주(1915~2000)의 호는 미당(未堂)이다. 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논어에 말씀이 있다. 子曰 由之鼓瑟 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공자 말씀하기를 “유(由·공자의 제자로 자는 자로)가 비파를 거칠게 뜯는구나. 좀 듣기 그렇군.” 그 말을 듣고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아직 방에는 들어가지 못했지. 하지만 당에는 오른 인물이야.”) 방(室)에 들어가려면 순서가 있다. 당(마루)에 오른 다음에야 실(室)에 들어갈 수 있다. 당에는 오른 인물이라 했으니 자격이 있다 하겠고 문인들이 함부로 대할 그런 낮은 수준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리도 이해된다. 당에 오르지 못하면 실 여부는 왈가왈부할 바 못된다. 먼저 당에 오르라. 그 다음에 실을 논하라. 고약한 이야기도 하나 하자. 예전엔 정실(正室) 자식이 아니면 부친 제사에서도 마루에 오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마당에 서 있었다.

그 뛰어난 서정주지만 겸손했음도 알겠고 자부심도 알겠다. 자신은 아직 당에도 오르지 못했다 했다.

바둑을 견주면 대략 이리 말할 수 있다. 석 점은 미당(未堂)에 해당되고 두 점은 ‘승당이되 미실(未室)’이며, 선(先)이면 입실이되 아직은 점검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그렇기에 이렇다. 두 점으로 한 집 승부를 낸다는 것은 겨우 당에는 올랐는지 모르지만 실에는 아직 못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다.

두 점 하수를 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아무리 도사쿠라 해도 상대가 슌치와 같은 실력자라면. 아무리 슈사이라 해도 상대가 노자와 5단과 같은 고단자라면. 그런데 이기든 지든 요점은 불과 한 집 차이라는 것이다! 두 집은 아니다. 고금 역사에서도 두 집 이긴 것을 자랑한 예는 본 바가 없다.

초점은 한 집이 ‘힘을 다했다’라는 점이다. 최선을 다하면 극미한 차이까지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실력이 미진한 상대를 입실시킬 수는 없다. 불가(佛家)에 비유하면 깨달았다 큰소리치는 상대를 철두철미 검증해야만 한다. 그것이 역사에서 마조(馬祖·709~788, 당나라의 승려로 깨달음이 컸다)와 같은 선지식이 한 일이었다.

그러니 두 점으로 한 집을 이긴다든가 진다든가 하면 아직은 상대를 입실시키지 않겠다는 자부가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면 어찌 되는가. 타인의 평가가 필요 없다. 명인들은 스스로 진짜 명인임을 자부할 수 있다. 명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점 하수는 거의 등 뒤까지 쫓아온 기사. 상대가 강한 만큼 져도 한 집을 져서 최대한 버텼다면 자부심을 안겨주는 존재가 두 점이다.

반상의 典故는 문학에서의 전고와 같다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 없이는 전고(典故·앞선 범례)는 없다. 자부는 역사 속 자신의 위치를 알 때 비로소 오는 것. 그러기에 자부와 전고는 함께한다.

40년은 된 듯한데 한국 제1세대 정치학자 서임수(93)씨 수필이 생각난다. 하루는 집으로 막 돌아오니 현관까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 톨스토이!” 하고 한마디 던졌는데, 방에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어린 아들이 크게 웃더라는 이야기. 그래서 자신도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

빙그레 웃음 짓는 분이 계실 듯하다. “아~ 톨스토이!” 하고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고 “아~ 크로이체르!” 탄식도 있을 듯하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중에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있다. 도덕적으로 엄격했던 톨스토이가 세간의 사랑을 그린 것이다. 그래, 좌우간 이런 게 전고의 활용이다.

문학에서 전고는 자주 활용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쓰는 자는 읽는 자를 겨냥해서, 그것도 고급스러운 독자만 겨냥해서 사용하는 기법이다. 권위가 실린 긴 이야기를 축약하는 것도 속성 중 하나. 이야기가 축약되면 상징이 되고 신화가 된다.

도사쿠는 『논어』를 읽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중세 막부시대 혼인보(本因坊·승려 출신 바둑가문) 등 바둑가문은 공부도 했다. 남겨진 서찰을 보면 그들의 공부가 만만찮았음을 알 수 있다. 도사쿠는 자신도 모르게 승당입실(升堂入室)을 주관하는 자의 자부를 드러냈다. 그 이후엔 후대의 기사들이 도사쿠를 전고로 삼았다. 바둑만 보면 도사쿠는 성인의 자리에 있다. 기성(棋聖)이라 불렸고 실력 13단이라 했다. 성인은 세상에 의미를 주는 자리다. 그러니 바둑에서 후대 명인들은 적어도 한 번은 두 점으로 한 집을 다퉈 도사쿠와 같은 반열에 서고 싶어 했다. 어느덧 “두 점에 한 집”은 신화가 됐다.

조훈현 이긴 뒤 아무 말 안한 우칭위안
1966년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 9단이 바둑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자색포장(紫色褒章)을 받을 때 기념식장에서 우칭위안 9단과 조훈현(62) 초단이 기념대국을 했다. 우칭위안과 조훈현은 둘 다 세고에의 제자다. 막 입단한 조훈현이 두 점을 놓았는데 우 9단이 한 집을 이겼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 9단은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

대국장이 화기애애해서 그런 걸까. 그렇겠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대가 지난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전통은 관습과 달리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제도인 까닭이다.

실력마저 변했다. 명인이 프로 초단을 두 점 접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실력의 편차는 현저하게 좁혀졌다. 요즘 명인들은 두 점 바둑 둘 기회가 아예 없다.

굳이 두 점에 한 집이 아니어도 당대 최정상급의 누군가가 “이것이 나의 명국이다”라고 한마디 한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 든다면, 그 다음부터 좀 더 쉽게 “이것도 명국이다”고 한마디 할 수 있을 것인가.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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