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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숨이 통해야 불이 잘 타지요|문경새재에 은거중인 김옥길 전 이대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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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약속은 불리한 것일지라도 꼭 지킨다고 했지요. 이렇게 약속대로 불렀잖습니까] 초년5월 문교장관직을 물러난 후 문경새재에 있는 시골집(충북괴산군연풍면원풍리)에 은거하다시피한 김옥길 전이대총장은 그동안 바깥 출입이나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좀체 하지않고 지내왔다. 신문이나 방송인터뷰 신청 역시 완곡하게 거절해 온 터여서 제자인 기자도 몇번이나 시골행을 헛걸음할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2월, 3번째 인터뷰신청때 그는 『봄이되면 무언가 이야기할것이니 기다려달라』는 약속을 해주었으며 11일밤 서울의 집 (서울서대문구대신동92) 에서 그 약속은 지켜졌다. 그동안『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나의일』이었다는 김명예총장은 이달말 미유니언연합신학대학에서 주는 유니언메달을 타러 가는길에 미국에 있는 이대동창들을 만나 이화1백주년 기념을 위한 일을 상의하겠다는 것이었다. 『자격없는 사람이 받는 상인것같아 사양하고싶었으나 추천하신 분들, 그리고 김활난박사와 유니언대학과의 유대등을 생각해서 거절하지 못한거지요)수상에 대한 소식부터 전해준다. 이번 미국행은 그가 문교장관때 마지막으로 하와이에 다녀온 후 3년만의 해외나들이가 되며 함께 살고있는 동생 김동길씨(전연세대부총장·서양사)와 함께간다. 유니언 메달은 1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수여하는 명예박사와 상응하는상으로 지난해 처음「앤드루·영」씨(전미유엔대사), 「조지·케년」씨(전주소미대사)에게 주어졌으며 세번째로 동양인인 김박사가 타게된 것이다. 메달 수여식은 4월5일.
약속을 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척 건강해지신것 같아요.
『시골생활을 하면 건강해지는 법이지요. 아무 스케줄에도 얽매이지 앉고 특별히 하는일도 없이 자연의 관찰자로만 있는다면 마음도 몸도 다 건강해집니다. 3년전 모든 공직을 떠나 시골로 내려갈때에 비하면 무척 건강한 얼굴이다. 검게 그을은 얼굴에 눈망울은 더욱 초롱해 보인다.
서울에도 잘 나오시지 않으셨지요. 『몇달에 한번정도 나온셈이지만 서울에 오면 우선 답답해서 빨리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져요. 요즘은 미국 떠날 준비때문에 서울에 머물고 있지만.』 최근교복자율화가 이루어졌는데 첫발안자인 선생님이 이를 보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서울에 오면 답답해>
『당연한 길을 가는것으로 봐야겠지요. 첫 발안자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것은 아닙니다. 시골에서 장작을 지피며 생각해 본 것인데 장작의 위를 너무눌러 두거나 막아두면 불이 잘 붙지 않더군요. 바람과 숨이 통해야 불이 잘타요. 많은 사람의 소질과 창의성을 길러 주려면 이같은 점을 생각해서 숨과 바람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대학에는 탈락생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것 같아요. 선생님의 의견은? 『모든것에는 일장일단이 있어요.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지요. 그 노력뒤에 오래 기다릴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법입니다. 교육에는 울타리가 필요하긴 하나 울타리가 너무 좁으면 마음껏 클수가 없어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이대도 남녀공학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더러 나오고있는데I.
『학교란 원칙과 목적이 있는 법입니다. 시대의 기호나 요구를 따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원clr을 무시하면서까지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교마다 특성이 있고 그 특성에 따라 선택하게 되는 것인데 구태여 남녀공학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 세계적인 경향도 그렇고 우리나라에도 독신이 늘어나고 있어요. 선생님이 독신으로 사신데는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었읍니까.
『누구든 독신을 선택해서 독신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그동안 할일이 많았고 내 능력으론 두가지를 할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할수 없었넌 거지요.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혼자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서로 기대 사는것 아니겠어요. 내가 늘 강조해온 말.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 나도 내 분수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
독신에 대한 질문은 몇번이나 회피하다가 어쩔수 없다는듯 대답했다.
요즘 기독교에는 광신이라 이름붙일만한 경향이 눈에 띄어요.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신앙도 상식을 벗어나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해를 입힌다고 생각해요. 「내가 성령을 받았다」 「하느님이 나만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우습지 않아요? 하느님은 나만을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대단한 효녀라는 평판이 있어요. 현대에 있어서의 효란 어떤것일까요?
『내가 효녀라니-. 아뭏든 효에 대해 옛날과 현대가 다름이 있을까. 부모가 생존해 계실때 형제간 우애를 보여주고 이웃간에 화목하고 서로 사랑함을 보여줄수 있다면 어느 시대에서도 효를 한다는말을 들을수 있겠지요』
'시골생활에 대해 이야기좀 해주세요. 『「아무것도 안한것이 나의 지난 3년」이라고 했지만 자연의 관찰자가 되어 자연속에서 느끼고 배운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가을이 깊어갈때 주의해 보면 이미 모든것은 봄맞이 준비를 해 두고 겨울로 들어가지요. 여기에 자연의 큰 뜻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별히 좋아 하시는것은?

<스케줄 없는게 일과>
『옛날부터 내겐 특별히 좋아한다는 것이 없었어요. 모든것을 다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꽃도 그렇고 나무도, 동물도 모두 그래요. 시골에서 잘 관찰해보면 보잘것 없는 잡초하나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더군요. 생각해 보면 천한것이 하나없고 좋지 않은것이 하나도 없어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귀한 그 사람을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골에서 교회나 주일학교의 일을 보신다면서요.
『주일학교를 하나 열고 있지만 이대대학교회의 선생님들이 토요일 내려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는것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그곳 시골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세요?
『1녀에 두어번 집으로 초대해서 놀다가게 하지요. 이곳 아이들처럼 무관하게 드나드는것 같지는 않아요. 초대하지 않으면 오지 않아요. 이곳 아이들은 나를 총장할머니」라고 부르는데 그곳에서는「장관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장관할머니」 에 비해 「총장할머니」 가 더 무관한 호칭같다고 덧붙인다.
시골에서의 일과는 어떻습니까.
『저녁7시반이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4시면 일어나 산책을 합니다. 요즘은 TV를 가끔 보지만 얼마전까지는신문·잡지책은 물론 TV도 보지 않았어요. 전화도 놓지 않았으니 예고없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맞는것도 한가지 즐거움이었고…」
어떤 농사를 지으십니까.
『8백여평의 밭에 옥수수·고추·무우·콩·팥등을 심는데 1년은 충분히 먹을수있는 양이 나옵니다. 농사짓는 재미는 정말 도시인에게 알려 주고싶습니다.』
선생님이 대학에 계실때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고 들었는데 이름 외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시골선 .장관할머니>
『그건 노력입니다. 내가 시골서 처음 이전에 울라왔믈때 기숙사 사감되시는 선생님이 담박에 내이름을 외어 우리어머니를「옥길 어머니」라고 불러주시더군요.
어머니도 나도 모두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그이후 난 누구의 이름도 기억해서 대인관계를 좋게 해보려고 노력했지요.
사람은 서로를 알아준다는 것도 중오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해외나들이 일정은 어떻게 잡으셨읍니까?
『미국에서 1개윌간 동창들을 만나고5월엔 스케줄없이 그냥 유럽여행을 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스케줄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았기 때문에 한달정도 자유롭게 다녀보고 싶어서지요.』 자연인생활 3년에서 느끼신 것은? 『책임이 없어 편안하긴 했지만 수고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읍니다』
-그럼 앞으로 어떤 계획이라드 세우시렵니까.
『우선 해외나들이를 하고난 다음 고사리마을에 있는 8만여평의 이대학생휴게소 건설을 서둘러볼 참입니다. 그곳의 내집도 모두 이대동창의 집으로 기증했으니까요』
자연속에서 건강을 되찾은 김옥길명예총장은 그 건강으로 무언가 근사한 일을 해낼것처럼 보인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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