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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⑩국제] 98. 미국은 상전 아닌 우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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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환영하고 있다. <중앙포토>

“뽕뿅”…. 1953년 6월 한국 중동부 전선의 미군 제300 자주포 부대. 미군 부대‘쇼리(하우스보이)’였던 백성학 소년(당시 13세)은 포탄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2년 넘는 군부대 생활에서 “뿅뿅” 소리는 포탄이 가까운 곳에 떨어지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북한 군의 포탄은 가까운 휘발유통에 명중했다. 주변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고 그 불길이 소년을 덮쳤다. 온몸이 불덩이가 될 순간이었다. 이를 본 한 미군 병사가 야전 잠바를 들고 뛰어와 소년을 구했다. 그가 빌리였다. 빌리는 전신화상을 입은 백성학을 20km 떨어진 미군 야전병원으로 후송해 목숨을 구해줬다.

그로부터 36년 뒤. 백성학(영안모자 회장)은 전 세계에 연간 1억 개의 모자를 파는 ‘모자왕(王)’이 됐다. 그의 기사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것을 계기로 생명의 은인 빌리와 극적으로 해후했다. 89년 5월 빌리(실제 이름은 데이비드 비트)는 백성학을 껴안고 “학, 옛날보다 많이 컸군”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6·25라는 생지옥에서 한ㆍ미 관계가 만들어낸 미담이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동맹’이라는 껍질을 살짝 긁어내면 그 밑에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과 분단 국가 간에 존재하는 불균형의 현실이 깔려 있다.

50∼70년대는 숭미(崇美)시기였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막아주는 수호자이자 자유민주주의가 꽃핀 이상국가라고 믿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당시 한국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에 400억 달러 이상을 전비(戰費)로 쏟아부은 미국은 한국 경제재건을 위해 엄청난 원조를 했다. 40대 후반을 넘는 중ㆍ장년층은 유년 시절 미국이 보내준 탈지 분유와 구호 양곡으로 만든 옥수수빵을 먹고 자랐다. 미국은 4ㆍ19 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감싸는 대신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학생 편에 섰다.

65년 주한 미 공보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어느 나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8%가 미국을 꼽았다. 미국이 싫다는 응답은 1%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중국(78%)이었다.

한국 사회에 “양키 고 홈” 구호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초.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82년 3월),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85년 5월)등을 계기로 반미는 학생 운동권의 주요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운동권은 ‘남북 분단=미국 책임론’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부대가 미국 승인 없이 동원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85년 서울대 학생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한ㆍ미 관계에 불만을 가진 학생의 비율은 70.9%에 달했다.
90년대는 반미 의식이 전 사회로 확산된 시기였다. 미국이 통상마찰 과정에서 수퍼 301조 발동 등 고압적 태도를 보이자 ‘미국은 영원한 친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국의 대미관 변화는 세대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6·25 시절을 겪은 전쟁 세대는 이제 20%선에 불과하다. 반면 전후 세대는 80%를 넘는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 나이키 신발, 할리우드 영화를 향유했다. 문화적으로 친미 성향이나 광장에서 성조기를 찢으며 반미 감정을 표출한다. 이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상전’이 아니다.

숭미로 출발해 친미쭭반미쭭혐미쭭반(反)부시로 이어진 한국 사회의 대미 인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23년 전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구속됐던 16명에게 ‘미국에 대한 시각’을 묻자 12명은 “이제 반미가 아니라 용미(用美)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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