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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성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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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기도 이천군 율면 오성리 조선왕조의 탄압과 핍박속에서도 4백여년간 끈질기게 개성왕씨의 혈맥을 이어온「왕서방 마을」. 마을전체 60여가구중 10여가구를 제외하고 몽땅 개성 왕씨들이다.
조선 선조조의 어느날, 방랑객으로 보이는 더벅머리총각이 이 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귀인의 풍모를 지닌 미남청년 그가 바로 이 마을에 개성 왕씨의 씨를 뿌린 왕경지였다.
중시조 왕미의 7세손. 과천지방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해오다 왕씨라는 이유 때문에 주민들의 천대가 심하자 떠돌이 행각 끝에 인심좋은 오성리에 정착했다한다.
그후 마을처녀 제주고씨와 혼례까지 치러 외아들 식을 낳았다. 왕식은 도창·도행·도환·도형등 4명의 아들을 낳아 개성왕씨의 숲을 이루었다.
이후 자손들이 점점 번성, 오성리가 왕씨의 소굴(?)이 되자 조정에서는 불안을 느낀 듯 이마을 왕씨들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했다한다.
『마을을 중심으로해서 5리밖에는 나가살지 못하도록 왕씨들의 발을 묶어놓았지 뭡니까.이 마을의 옛이름 자오리는 이런 연유로 생겨난 것이지.」왕경지의 10세손 왕재형씨(68)는「왕씨수난사」를 이렇게 들려준다.
마을 중앙에 우람히 버티고선 4백년연륜의 은행나무는 이 지역일대의 명물.
임향조 왕경지가 심어놓은 동수호무를 타성받이들이「왕씨네 나무」라고 부른다.
때문에 오성리 왕씨일문은 이 고목을 신주처럼 모시고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제사를 지낸다. 마른 북어를 뜯어놓고 돌아가며 술을 한잔씩 올리고 소원성취를 빈다.
아낙네들은 나뭇가지에 실타래를 걸어놓고 가족들의 장수를 기원한다.
차가운 봄시샘바람속에 하얀 눈꽃을 피우며 대지의 심층에 굳게 뿌리내리고 의연히 버티고선 고목은 개성 왕씨의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마을주민들의 주소득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농사. 최근에는 고추·담배등 특용작물 재배로 가구당 연평균 3백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개성 왕씨는 후삼국의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왕조 고려를 연 태조 왕건의 후예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면서 멸족의 비운에 몰려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꾸고 변방에 몸을 숨겼기에 5백년 영화를 누린 왕족은 오늘날 한미한 희성으로 명맥을 잇고있다.
남한에 1만4천여명. 성별인구순위 97위.
그러나 영웅의 후예, 왕족의 긍지는 5백년 수난의 세월에도 가실수 없는 것 잔인한 보복의 발길을 이기고 이제 가문의 재흥을 준비하고있다.

<성바꾸고 숨어>
우리 역사상「임금으로서의 마지막 영웅」이라고나할 대조 왕건은 신라말 송악(개성)에서 용건의 아들로 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의 토호였고 그는 나면서부터 영걸의 자질을 지녔다. 스무살에 태봉국왕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을 세우고 중신의 자리에 올랐으나 난세평정의 새주인으로 믿었던 궁예가 나날이 횡포해져 폭군으로 변하자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등 동료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대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국호를 고려로 정하며 18년만에(서기935년)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한 뒤 다음해에 후백제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통일을 이룩했다. 북진=만주고토회복을 국시로 내세운 5백년 왕업이 열린다.
이후 34왕, 4백75년-. 왕씨의 역사는 그대로 고려사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8만대장경을 각인하는 불교문화를 꽃피웠으며「세계 자기중의 자기」,「자기의 여왕」으로 꼽히는 고려자기를 구워내는 찬란한 문화에도 불구, 왕건이 세웠던 대고구려부흥=만주옛터전수복의 비원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원대신 들어선 명이, 원이 빼앗아 지배하던 철영이북 옛땅을 내놓으라고 억지 요구를 하자 최영장군이 우왕을 설득, 8만대군을 일으켜 정명의 장도에 나섰다가 이성계의 위화도의군으로 고려는 무너지고만다.

<태종이후 안심>
왕업이 무너지며 왕족 왕씨들은 멸족의 참변을 만난다.
1392년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날 전국의 왕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체포된 왕씨들은 거제도와 강화도에 집단수용했다.
2년도 채되기전인 1394년4월15일, 이성계는 이들을 전부 수장시켜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상을 불허하는 잔인한 정치보복, 대량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희생된 왕씨들은 어림잡아 10여만명. 개성왕씨세보는 공양왕을 비롯, 당시 강화·거제도등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l백여명 선조의 명단을 기록, 역사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있다.
관원의 눈을 용케 피신한 소수의 왕씨들은 왕·금·마·전·전·김씨등으로 왕자를 변형한 성으로 변성, 숨어사는 외토리가 되어 혈맥을 유지했다.
태조가 죽은후 태종은 왕씨에 대한 탄압은 잘못된 것이라 하여 체포령을 철회했다. 태종이 이같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어느날밤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났다. 그는「왕씨에 대한 살육을 멈추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호령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태종이 이꿈을 무심히 지나쳤다한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났을 때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제주도에서 사육중인 병마 수백 마리가 이름모를 병으로 죽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호남일대까지 확산, 이 지방일대의 가축들이 시름시름 죽어갔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이 꿈얘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뭏든 태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씨 탄압정책을 완화하는 한편 숨어있는 왕씨들을 찾아내도록 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현재 개성 왕씨들이 중시조로 받드는 왕미다.
그는 그동안 외가성인 민씨로 행세해오다가 이때 본성을 되찾았.
이후부터 왕씨는 고개를 들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거의 없었다. 벼슬은 시키지도 않았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굳이 벼슬한 인물을 든다면 왕방연(단종조·도사), 왕희걸(인종조·부제학), 왕의성(선조조·의병), 왕태(영∼정조조·조령별장)등이 전부다. 이중 왕방연은 폐위된 단종을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했던 장본인.『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희옵고, 내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물도 내안(마음)같애야 울어 밤길 예놓다(가다).』단종을 영월에 안치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심정을 읊은 이 시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명시조다.
왕상은(국회의원) 왕윤국(동원수산(주)회장) 왕학수(문박·전고대교육대학원장) 왕기황(고대교수) 왕영식(서울대 농대교수) 왕항철(전 동양종합산업(주)회장) 왕철구(전 대한철강개발(주)사장) 씨등이 해방후 사회각계에서 활약해온 인물들이다.

<지명인사>
▲왕건항(전 우석대학 사무처장) ▲왕권직(전 서울신문사 출판기획부장) ▲왕만수(전 왕자지업사장) ▲왕봉상(전 한국기연전무) ▲왕오종(전 철도노조위원장) ▲왕재만(전 부산일보총무국장) ▲왕준항(전 강남공영(주)사장) ▲왕표순(송곡여중·고교장) ▲왕진석(공박·충남대교수) ▲왕연균(경박·중앙대교수) ▲왕종순(의박) ▲왕진호(의박) ▲왕규선(의박) ▲왕영종(의박) ▲왕창종(인하대공대교수) ▲왕성학(전 교통부 부이사관) ▲왕창업(전 식은감사) ▲왕조혁(전 공보처비서실장) ▲왕학원 (중앙석유부사장) ▲왕재순(전 종친회장) ▲왕진수(전 한일경제문화협회 전무이사) ▲왕금상(전 한국전분협동조합 전무이사) ▲왕종배(삼중개발(주) 이사) ▲왕도원(전 은행감독원 검사역) ▲왕제동(서초개발사장) ▲왕유장(강남재향군인회장) ▲왕영천(민한당 중앙상임의원) ▲왕홍식(민정당 중앙위원) ▲왕제성(송림농원사장) ▲왕교수(광신기업사장) ▲왕성덕(삼중개발(주) 사장) ▲왕운주(제일은행 검사역) ▲왕영남(대우자동차(주) 기술이사) ▲왕석호(왕자직물사장) ▲왕인석(한학자) ▲왕일호(대한노트회장) ▲왕성욱(신흥양회판매(주) 사장) ▲왕태은(협성해운(주)사장) ▲왕길은(협성큰테이너 (주)사장) ▲왕수덕(동아대교수) ▲왕세창(부산전문대교수) ▲왕수권(영창해운(주) 전무이사) ▲왕성훈(삼우통상진흥공사사장) ▲왕호권(유신화학사장) ▲왕준련(요리연구가) ▲왕영국(대명상사사장) ▲왕문수(신성상사사장) ▲왕수헌(고려날염공사 대표) ▲왕한중(건축가)

<대종회 제공·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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