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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명절을 명절이게 하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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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매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아침저녁 맨팔뚝에 오스스한 한기가 끼친다. 장거리로 나가면 벌써 사과.배에, 침을 담가 아린 맛을 뺀 파란 풋감이며 밤과 풋대추가 보이고 산골에서 온 할머니는 싸리버섯.송이버섯.능이버섯을 펴놓고 오가는 사람을 붙든다. 추석이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신을 만한 고무신을 추석에 새 신으로 얻어 신으려고 흉한 짓을 한다. 집 뒤 성당 둔덕에 앉아 사금파리나 구부러진 녹슨 못으로 고무신을 찢는 것이다. 발만 겨우 꿸 수 있도록. 그런 신을 신고 엄마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시위를 한다. 엄마. 영순이는 나이롱 쉐타를 입었어. 미자는 고르땡 바지 입구. 나만 창피해서 나가 놀지도 못해. 이번에 꼭 사줘야 해! 누가 추석날 치마 저고리 입나 봐라!

추석을 앞두면 열 살짜리 나는 참 맘이 바빴다. 행여 추석빔을 얻어 입지 못할까 불길한 꿈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바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엄마와 작은엄마였다. 차례 준비로 한 달 전부터 보기 좋은 크기의 명태를 사고 열기(우럭)를 사서 꾸덕꾸덕 말리되 파리가 쉬를 슬지 않게 해야 했다. 늦은 장마라도 오면 다 허사였다. 추석이 이르게 들면 어렵게 햅쌀을 됫박으로 구해 차례상에만 올릴 메를 지어야 했다. 부엌에 가마니를 깔고 온종일 놋쇠 제기를 닦는 일로 시작해 술을 담그고 제수를 장 보고 넉넉잖은 돈을 계산하고 줄줄이 있는 새끼들 기쁘게 하려고 새 옷도 미리 사다가 장롱 깊이 감춰 뒀다. 추석 이틀 전부터 쌀을 불리고 송편에 넣을 팥을 삶고 밤을 까고 풋콩도 까둔다. 종종걸음이다. 아버지는 산에 가 솔잎을 따왔던가? 아버지가 한 일은 기억이 없다.

술은 며칠 전에 걸렀다. 술 지게미에 당원을 넣어 먹으면 알딸딸해졌다. 두부도 미리 했다. 송편은 하루 전에 빚었다. 큰집.작은집 아이들 모두 합해 접이 넘는데 그 동무들까지 붙어 와서 송편을 집어 가면 한 솥 쪄 내야 게 눈 감추기다. 그래도 아이들을 쫓을 수 없었다. 이날 아니면 저 좋아 날뛰는 새끼들 모습 정월 명일까지 못 봤다. 떡 사발을 동네 집집마다 돌리는 일은 큰 아이들 몫이었다. 떡 함지 비어 드는 거 아쉬워 툴툴대는 아이가 누구네 누구네 떡으로 다른 함지가 그득해지면 입이 벌어졌다. 나누면 돌아온다고 가르칠 게 따로 없었다. 하루 종일 기름내 풍기며 지짐을 부치고 밤에는 몇 가지 생선을 찌고 문어를 삶는다. 엄마는 한두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나물을 볶고 무치고 차례 음식을 제기에 괴었다. 아버지는 마당을 쓸고 고방에서 다리 높은 제상을 꺼내고 병풍과 자리도 꺼내 펴놓았다. 추석빔 생각과 고기며 생선 먹을 생각에 들떠 잠을 설친 아이들은 토끼눈을 비비고 세수했다. 엄마가 어젯밤에 내준 추석빔을 차려입었다. 남동생들은 갑자기 근엄해져 차례 음식을 나르고 남자 어른들도 엄숙하게 입 다물고 조상 상을 차렸다. 음식은 여자가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남자가 했다. 여자는 얼씬도 못했다. 아이들은 배 터지게 고깃국에 이밥 먹고 밤.대추 손에 들고 옷 자랑하러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에 보릿고개와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과 딸은 출가외인이며 일하는 여자는 가문의 수치일 때의 '전설'이다. 오늘의 추석은 그 의미가 다 낡았고 오직 차례상만 남았다. 그것도 장남이나 장남 구실 하게 된 아들에게만 남았는데 정작 차례 준비는 아내들의 몫이다. 아내란 근본적으로 다른 집안에서 온 사람이며 아내들 중엔 남자처럼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조건이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을 생기게 하는 핵심이다.

추석 명절이 명절이 되게 하려면 아파트와 휴가와 핵가족과 산업화 구조에 딱 들어맞는 틀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나 기다려지고 누구나 행복한 '명절'이 될 것이다.

이경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