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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평생 함께할 친구를 만났다, 이 책갈피 속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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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14년의 마지막 ‘책 속으로’ 지면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의 다독가(多讀家) 8인이 추천하는 책을 모아봤습니다. 여기 소개된 책은 베스트셀러나 출판계를 뒤흔든 대작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마음에 깊숙이 다가가 빛나는 영감을 선사한 값진 책들입니다.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은 좋은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것만큼이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한 해를 정리하며 독자분들도 한번 꼽아보시면 어떨까요. 올해 당신을 움직인 한 권의 책은 무엇인가요.

황현산 문학평론가
●그리스의 끝 마니
패트릭 리 퍼머 지음, 강경희 옮김
봄날의 책, 516쪽, 2만원

마니 반도에 대한 옮긴이의 소개를 먼저 요약한다. 북으로는 백두산 높이의 타이게토스 산맥으로 막히고, 남으로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인 그리스의 오지이며 변방이다. 역사적으로 마니는 패망한 스파르타로부터, 비잔티움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베네치아가 장악한 크레타에서 도망친 사람들, 자치와 생명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은거했던 곳이다. 그리스에서 기독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곳이고, 오스만에 저항한 게릴라이자 산적인 자들의 본거지이고, 그리스 독립투쟁의 발화점 가운데 하나였다.

 풍토는 돌투성이 황야에 가깝지만, 마니는 매혹적인 땅이다. 유럽과 서아시아의 거의 모든 인종의 피가 섞여 있고, 그만큼 여러 문화가 교배를 하여 그 흔적을 남긴 곳이다. 낡은 농담으로 즐기던 사람들은 새로운 농담을 배우기 위해서도 손님을 환대한다. 가난하기에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호메로스 시대의 온갖 신들이 기독교 성자의 이름을 둘러쓰고 여전히 살아 있으며, 사람이 생각한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신성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문화인류학 서적 백 권을 읽는 것과 같은 생산성을 경험한다.

 책의 저자 또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제도 교육의 틀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중퇴하고, 18세에 “방랑자처럼, 순례자처럼, 떠돌이 학자처럼” 걸어서 유럽을 횡단하며, 외국어를 귀동냥으로 배웠다. “대단히 총명하고 대단히 지저분한 청년”이었던 그는 유럽의 거의 전 지역의 여행기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하며, 그리스 게릴라들과 함께 크레타 섬 군정장관 하인리히 크라이페 장군을 납치했다. “인디애나 존스와 제임스 본드, 그레이엄 그린을 합쳐놓은 인물”이라는 명성을 그렇게 얻게 된다.

 지구 반쪽의 문화와 역사를 꿰뚫는 박학한 지식, 자연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서두르는 법이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는 능란한 화술,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가지에 가지를 치는 저자의 문장들은 인간세상을 구성하는 거대 실뿌리조직의 알레고리와 같다.

성석제 소설가
●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지음, 민음사
312쪽, 1만3000원

1997년부터 나는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물론 네댓 명의 예심위원 가운데 하나였고 예심에서 10여 편의 작품을 가려내 본심 심사위원에게 맡기면 그것으로 일은 끝났다. 예심 통과작 중에 단 한 편, 한 사람의 작가를 뽑아야 하는 본심 심사위원에 비하면 한결 일이 쉬웠다.

 당시 나 자신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2,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신춘문예가 아닌 문예지에 시로 등단한 게 10년쯤 됐는데 그 무렵 나와 비슷한 나이의 소설가들이 신춘문예의 예심위원이 되었고 시 등단을 소설 등단으로 착각한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에 의해 나 역시 얼떨결에 소설 예심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시인 기질이 남아 있던 나로서는 예비 작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어렵게 쓴 소설을 가차 없이, 순식간에 평가하고 폐기처분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게 ‘효율적인 심사’인 줄 알았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예심을 하다가 1999년에 이르러 한 문예지에서 예심과 본심을 겸한 심사로 한 사람의 신인을 뽑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선발한 신인작가가 이기호였다. 그의 단편 ‘버니’는 일단 재미있었다. 말을 부리는 게 직관적이라고 할 만큼 능란했고 재기가 넘쳤다. 어두운 인간 생태계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한 사람의 신인작가를 뽑아 세상에 선보일 때의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알게 된 그 이후로 나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기호의 활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여전히 재미있고 흥미로웠으며 파격적인 작품을 쑥쑥 잘도 내놓았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내가 애초에 상상하지 못했던 이기호의 재능, 그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소설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역사와 희비극으로 도식화되지 않는 인간의 삶, 필연적 우연에 휘감기는 존재와 관계의 세부를 이토록 천연스럽게 그려내는 작가가 있을까.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심사위원으로서도 정말 운이 좋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 무겁고 긴 감동이 온몸을 덮쳐왔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다른 길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
352쪽, 1만9500원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착한 책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는 책이 있다. 『다른 길』은 문명의 이기(利器)와는 담을 쌓고 사는 ,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어떤 첨단문명 속의 도시인보다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른 길』의 언어는 두 가지로 갈라져 흐른다. 사진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 박노해가 수동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찍어 종이에 인화한 아련한 흑백사진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환기시키는 메신저다. 시인의 언어는 사진 속의 공간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우리를 ‘잃어버린 시간의 미로’ 속으로 안내한다.

박노해 사진 속의 수많은 얼굴들은 미디어와 기계와 자본에 갇히지 않고서도 삶의 품격과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노래한다. 인도네시아, 라오스, 티베트, 인디아를 거쳐 파키스탄까지, 박노해는 지도에도 없는 마을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본다.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그들은 “거대 독점 시스템도 고압송전의 낭비도 없고 블랙아웃과 전기세 걱정도 없는 최고의 적정기술”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 기업과 정치가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착취하는 ‘자원’을 ‘자연’으로 존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꿈꾼다. 뜨거운 혁명과 지독한 고독, 기나긴 방황의 터널을 거쳐 ‘이젠 영원히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인은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투쟁과 눈물을 그려내며 서서히 ‘다르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

시인은 15년 동안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을 유랑시인으로 떠돌았지만 그의 유랑노트는 독자들에게 ‘다른 길’을 선사하는 새로운 별들의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와 제인 구달의 『희망의 씨앗』을 『다른 길』과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온갖 잡념과 세속적 열망에 길들지 않는 ‘나만의 별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쟈(이현우) 북 칼럼니스트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승계호 지음, 석기용 옮김
반니, 600쪽, 2만9000원

지난 10년간 나를 가장 경탄하게 만든 한국 학자를 한 명만 꼽자면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에 재직 중인 승계호 교수다. 재미 학자로 줄곧 영어로 쓴 저작을 발표해왔으니 ‘한국 학자’라기보다는 ‘한국인 학자’ 내지 ‘한국계 학자’라고 해야겠다. 1930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3년간 복무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세대로서는 드문 이력이겠지만 그 자체가 경탄을 낳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공부한 것이 자연과학이 아니고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이 좀더 ‘실용적인’ 학문도 아닌 인문학이라는 점이 일단은 이채롭다. 그것도 단테의 『신곡』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으로 서양 인문학의 대표급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면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학위논문을 끝으로 학자로서의 이력을 마감하는 허다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인문학 전반을 종횡하며 주목할 만한 문제작들을 연거푸 발표한 세계적 석학으로 우뚝 섰다. 언젠가 『단테 읽기』란 영문 입문서를 펼쳐보았다가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가 승계호(영어명은 T K Seung이다)인 걸 알고 괜히 부듯했던 기억도 새롭다.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는 ‘승계호 인문학’의 힘, 혹은 그의 고유한 방법론인 ‘주제학’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다. 독일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인 괴테의 『파우스트』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저자는 절대주권을 주장하며 신처럼 되기를 갈망하는 파우스트적 주인공이 스피노자적 자연주의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연속적인 작품으로 이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패러디이고 니체는 ‘니벨룽의 반지’가 『파우스트』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해했다는 대범한 견해도 제시한다.

 매우 논쟁적인 해석이지만 동시에 아주 강력하며 대단히 매력적이다. 작품을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 새로운 해석의 힘이자 비평의 의무라면 승계호는 내가 아는 최강의 비평가다.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건국대 의대 교수)
●선생님의 가방 1·2
다니구치 지로·가와가미 히로미 글, 다니구치 지로 그림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각 권 202·236쪽, 각 권 1만1000원

30대 후반 싱글 여성이 있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단골 술집 카운터에 앉아 참치낫토, 연근우엉조림에 맥주를 주문한다. 그런데, 옆자리의 노신사가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안주 취향이 비슷한가보다 했는데, 그가 “오마치 쓰키코씨지요?”라고 물어본다. 이 남자, 아니 할아버지 도대체 누구지?

 알고 보니 그녀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만남은 시작된다. 처음 선생과 제자로 만난 뒤 20여 년이 지나 같은 단골집에서 만난 우연이 술친구로 이어져 더 깊은 관계로 진행해 삶의 인연이 되는 이야기.

 『선생님의 가방』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가미 히로미가 2001년에 써서 다니자키 준이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원작 소설을 『열네살』 『신들의 봉우리』 등 격조 있고 통찰을 주는 만화를 발표한 다니구치 지로가 그려냈다. 둘의 만남은 소설에 담기 힘든 시각적 상상과 여백의 미를, 만화가 놓치기 쉬운 글맛과 사유의 깊이를 채운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선생님의 집에 간 쓰키코는 전기 테스터를 발견한다. 선생님이 수십 년 동안 모아놓은 건전지에 테스터를 연결해 희미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미세하게 살아있네요”라 말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머지않아 전부 죽겠지만요”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은유적인 이야기가 시각적으로 그려진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한 번 씩 멈추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권 분량 내내 큰 갈등도 없고, 반전도 없다. 처음에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이란 비윤리적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난 다음, 젊은이의 사랑이 불타는 열정과 집착을 필수 옵션으로 한다면, 나이가 들 만큼 든 사람 사이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와 관계의 감정이 무르익어 자연스럽게 숙성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칫 나이가 들수록 빨리 가까워지고 싶은 조바심이 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이제는 더 이상 불가피한 관계의 상처를 주거나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큰 삶의 교훈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 아닐까. ‘그깟 만화 두 권’일 뿐인데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통찰의 시대
에릭 캔델 지음, 이한음 옮김
RHK, 707쪽, 3만원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원래 ‘과거에 대한 동경’으로 식욕감퇴와 우울감을 동반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뜻했다. 1688년 오스트리아의 의학도 요하네스 호퍼가 산 속에 주둔한 스위스 군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 쓴 말이다.

 『통찰의 시대』는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신경과학자인 에릭 캔델이 자신의 노스탤지어를 신경과학으로 승화시킨 내밀한 자기고백서다. 무척이나 지적이면서 매혹적인 자기고백서 말이다.

 그는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구스타프 클림트·에곤 실레 등 당시 풍요로웠던 빈 예술가들의 정취를 만끽하며 자랐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박해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됐지만, 빈에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 연구에 매료돼 뉴욕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했다.

 그 후 그의 연구업적은 눈부실 정도다. 달팽이를 이용해 기억의 생물학적 기저를 밝혀낸 공로로 2000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으며, 그가 쓴 『신경과학의 원리』는 읽지 않은 신경과학자가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당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과 그들의 예술작품을 신경과학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그래서 각별히 더 매력적이다. 그는 하나의 작품이 눈으로 들어와 어떻게 인지되고 감정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공감을 통해 해석되는지를 신경미학의 최근 성과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신경과학자들 사이에서 이제는 폐기된 개념인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신경과학의 최전선에 선 그가 함부로 폄하하지 못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술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신경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면서 그에 대한 존경과 비판이 공존하는 첫 장은 이 책의 압권이다.

 뇌는 예술에 대해 어떤 통찰을 주는가? 신경과학자가 2014년에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답이 이 책 안에 있다.

박찬일 셰프·음식 칼럼니스트
●북양어장 가는길
최희철 지음, 해피북미디어
198쪽, 1만3000원

고기 잡으러 베링해로 떠났다가 사고를 만난 오룡호 사건이 터지고나서 식탁의 명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우리 입은 이미 국토와 영해에서 나는 것들로는 채울 수 없게 됐다.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률 5% 시대를 사는 현실이 오룡호 사태를 불러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요를 향한 과욕의 업보이면서 동시에 현실이다. 우리는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근원을 모른다. 소나 닭이 한가한 목가적 분위기 대신 공장형 축산시설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수산물도 마찬가지다. 어선과 마도로스의 흥분따위는 없다. 만선을 향한 자본의 고유한 욕망이 지배하는 바다 사정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 있다. 북양은 명태잡이를 하는 저 북쪽 바다. 북극과 멀지 않은 추운 대양을 말한다. 까다로운 대국의 간섭과 무자비한 경쟁국의 어선들, 태풍에 버금가는 저기압에 맞서 싸우며 그물을 끈다. 어군탐지기와 군함에서나 쓰이는 줄 알았던 소나로 바다밑의 고기를 훑는다. 트롤 어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바다의 수확자다. 거대한 그물로 어군을 찾아 훑어낸다. 그것이 우리 밥상에서 반찬이 되는 생선이다.

 음식 공급이 시스템화된 현대는 개인이 그 좌표를 읽어낼 능력이 없다. 쾌적한 마트에 진열된 식품은 이런 구조에서 탄생하고, 원양어선은 그 시스템의 최초 생산자다. 깔끔하게 포장된 게맛살의 원료와 명란을 얻기 위해 오늘도 트롤 어선은 북양의 집채 같은 파도와 싸운다. 할머니 손맛의 동태찌개와 코다리조림의 근원이 저 바다에 있다니.

 흔히 예상하는 원양어선의 낭만적 묘사는 이 책에 없다. 시종 표준 혈압으로 담담하게 서술해나가는 터라, 오히려 현장감이 살아난다. 일상적 노동을 매우 건조하게 쓰고 있는 문체를 읽노라면, 마치 김훈의 소설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울컥하게 되는 것도 닮았다. 저자가 감성 넘치는 시인이라는 것은 책 서두의 들어가는 글에서 빛난다. 특별한 명문이다. ‘미시적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기록 문학으로서 가치도 함께 지닌 책이다.

차동엽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천국과 지상
교황 프란치스코, 아브라함 스코르카 지음
강신규 옮김, 율리시즈, 312쪽, 1만6000원

잠시 뜸한가 싶더니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이 “영적 치매에 걸렸다”며 호되게 일갈한 프란치스코 교황. 대체 그 노익장 ‘혁신 열정’의 원천은 무엇이며, 그 끝은 어디메쯤일까. 장르를 불문한 적폐들의 태산 앞에 청춘 지사들도 비틀거리고 젊은 동량들도 나자빠지는데, 비상한 돌파력으로 상서롭게 좌충우돌하는 프란치스코 교황표 추진력의 비밀은 정녕 무엇일까.

 『천국과 지상』은 그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훌륭히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기경 시절 긴밀한 친분을 맺어왔던 유대인 학자 아브라함 스코르카와 나눈 대담집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아랍-이스라엘 분쟁, 유대인 학살 등 민감한 주제에서부터 죄·죽음·이혼·낙태·동성애·안락사·빈곤·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 관한 교황의 육성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보가 어디서 비롯됐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랍비, 성경 및 랍비 문학 교수, 그리고 생물물리학자라는 3중 직분을 겸한 대담자의 이력에 있다. 스코르카는 종교간 소통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학자다. 말 그대로 천국과 지상을 아우르는 지혜의 스펙트럼을 마주하며 대담을 했기에, 프란치스코 당시 추기경의 거인스런 사량(思量)이 유감없이 노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인간으로서 살아가자면 꼭 맞닥뜨리게 되는 물음은 거지반 다 취급된 셈이라고 보인다. 흔히 종교간 대화가 빠져들기 쉬운 주제범위의 편협함이 불식되고, 대신 우뚝한 두 지성이 주고받는 자유로움이 흥겹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세상에 극복될 수 없는 갈등은 없으며, 구제받을 수 없는 저주도 없으며,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태 나름 그토록 설파해 왔던 사랑 그 너머, 그 새로움에 기분 좋게 설득당하고 압도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유유자적 태평세월을 누리던 내 마음 지대에 파문이 번지고, 게으르던 맥박이 부지런해지는 각성을 얻게 됐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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