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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6) 제79화 육사졸업생들(79)「5기생주도 반혁명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육사8기와 함께 5·16의 양대 주동세력이었뎐 육사5기생들은 혁명 성공 불과 1개월여만에 반혁명의 이름으로 혁명대열에서 거세되는 불운을 맛보아야 했다. 이른바「장도영일파 44명 반혁명사건」이 그것이다. 이사건으로 혁명주체 5기생의 거의대부분이 「군」과 「혁명」에서 이탈하게 됐다.
61년 7월1일 반혁명으로 구속된5기생 주체는▲공수단장 박치옥대령(최고위원) ▲헌병감 문재준대령 (최고위원)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안용학대령▲내각수반 비서실장 이회영대령▲서울지구 CIC대장 이희영대령▲내각수반 비서실장 보좌관 이성훈대령▲감찰위윈장 최재명대령▲구황실 재산관리 총국장 노창석대령▲송찬호준장 (최고위원) 등이다.
이들은 장도영의장을 중심으로 「박정희부의장과 그 측근을 거세하고 정권을 독점할 것을 모의했다」는 혐의다.
5·16성공후 2년7개월의 군정기간에 있었던 7차례의 이른바 반혁명이라는 이름의 사건의 첫번째인 이사건은 혁명의 명목상 리더로 옹립된 장도영중장과 실질적 리더인 박정희소장,그리고 5기와 8기 혁명주체간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으로 볼수 있다.
5기생들은 육사에서 장의장(교무처장) 과 박정희장군 (중대장) 에게 함께 배웠다. 때문에 두분을 다같이 따르는 입장이었다. 장장군과 박장군은 또 군안에서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박장군의 가장 큰 그늘이 장장군이 되어왔다. 박장군이 여순반란사건후 소령으로 군복을 벗고 예편했을 때도 불러다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육본에 근무케하고 자신과 직원들의 봉급에서 일부를 떼어 급료를 마련해준 사람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장장군일 정도였다.
이같이 밀접한 관계였지만 정권을 맡아 국가경영을 하게 되면서 이견이 대립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당초 혁명진압에 나섰다가 마지막에 혁명 지도자로 업힌 장의장은 육사8기와 박정희소장이 손을 잡고 추진하는 혁명시책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컸다. 6월3일 기자회견에서 장의장이 민주당각료의 신변보장을 약속한지 1시간도 못돼 중앙정보부가 전 각료를 체포한 일같은 것이 그같은 불협화음의 극적인 예다.
5기생 주체들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씨를 중심한 8기들의 독주경향에 불만이 많았다.
장의장의 측근인 비서실장 안용학대령과 이회영대령이 모두 5기로, 5기생들은 박부의장-8기 연합에 자연스럽게 대합세력으로 뭉치게 쬈다.
5기생 가운데 무력부대를 지휘하고있던 공수단장 박치옥대령과 헌병감문재준대령을 중심으로 5기 주체들은 6월중순부터 김종필씨 제거 계획을 구체화했다고 한다.
당초 7월3일을 D데이로 잡고 최고회의에 김종필중앙정보부장 해임결의안을 내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무력부대를 동원, 김씨를 체포하고 후임에김윤근준장(해병·최고위원)을 임명하며 박소장도 말을 듣지 않으면 거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대령이 6군단 포병단 대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8기 신윤창중령에게 사전에 『혹시 이상한 기미가 있더라도 너희 병력은 출동시키지말라』고 귀뜀을 한뒤 기밀이 새 실패했다는 것. 신중령은 그때 수도방위사령부 참모장으로 옮겨 있었는데 문대령으로부터 이말을 듣고 동기생인 김종필씨에게 알렸던지 김씨가 즉각 문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이러면 되겠느냐』고 중지를 요청했다는것.
5기생들은 3일 계획을 앞당겨 7윌1일 시행키로 했었으나 거사전 모두 체포됐다. 장의장은 7월2일 구속됐고 문재준대령은 6일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5·16은 육사8기가 중심이 됐다. 5기생 가운데는 김재춘대령,박춘식준장,채명신즌장,이원엽대령 등만이 주체로 남게 됐다.
반혁명 5기생들은 혁명재판에서 사형· 무기· 징역형등을 받았으나 사면·형집행정지등으로 1년 안팎의 옥살이롤 하고 풀려났다.
박치옥대령은 출감후 1년여 집에서 감시를 받고 지내다 석탄공사이사로 갔다. 박대령의 석공취업은 박대통령의 배려였다고 한다. 어느날당시 이석제총무처장관(8기)이 점심을 같이 하자며 초대해서는 『박선배가 놀고 계신것을 각하 (박의장)가 아시고 매우 야단을 맞았다』며 『아무직책이라도 좋으니 맡아달라』고 간청, 지나가는말로 『정 그렇다면 석공에나 갈까』했더니 그자리에서 상공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발령을 냈다고 한다.
박대령은 석공에서 8년6개월을 근무하다 구로공단전무로 옮겨 80년 7월까지 일했다.
문재준대령은 출감후 유공감사로 들어갔다.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71년 선거때는 신민당 김대중후보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정계 진출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비록 반혁명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박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근년 남미 이주를 추진하다 중지하고 상도동에서 자그마한 시계공장을 자영하고 있다.
송찬호준장은 출감후 외교관으로 전신, 주삿뽀로 총영사·일본공사를 거쳐 브라질 대사로 갔다가 퇴임한뒤 현재는 미국에서 공부한다고 들었다.
최재명대령은 국제관광공사이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쉬고 있으며, 노창석대령은 주정협회 회장직을 한동안 맡았었다.
이들 반혁명 관련자들은 모두 군에서 제적돼 군에서 봉사한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인데 몇차례 복적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0·26직전 인천체전에서 박대통령은 박치옥대령을 만나자 『잘하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고 했는데 얼마후 총격사건이 있었다고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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