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 문화

버릴 수 없는 희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오늘날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일까? 홍수.화재.교통사고와 같은 재난일까? 아니면 에이즈와 같은 질병일까? 혹은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한순간에 부숴버릴 수 있었던 테러리즘일까?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희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을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고무한다.

수녀회의 일로 말레이시아 사바에 머무르는 동안 커다란 홍수를 만났다. 특히 텔리폭이라는 가난한 동네 전체가 물에 거의 잠기게 되었고 그 피해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그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수녀원도 일부 물에 잠겼지만 그곳이 워낙 긴급해 대부분의 수녀들이 그곳을 방문했다.

무서운 비바람 속에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있었고 엉성하게 판자로 지은 집들은 있던 자리에서 떠내려가 물에 잠기고, 집기들이 흙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수마(水魔)가 뒤흔들고 간 고통의 현장에서 도움을 주려고 갔던 수녀들은 오히려 희망을 선물로 받고 돌아왔다. 우리는 도움을 준다는 입장으로 갔으나 더 큰 것을 얻고 온 것이다.

어느 집에선 찾아간 우리에게 자신의 집은 떠내려간 물건도 많지 않고 피해도 작으니 더 큰 피해를 본 집을 도와주라고 오히려 갖고 있던 음식을 나눠주었다. 또 폭우 속에서 남편을 잃고 천식에다 만삭의 몸을 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달려오다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사랑과 이웃의 도움에 감사했다.

폐허가 된 동네로 젊은이들이 삽과 청소 도구를 들고 먼 곳에서 달려와 바지를 걷어붙이고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수녀원의 싱가포르 후원자들은 돈을 모아 보내왔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물에 잠겨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기숙사를 도와 달라는 글을 신문에 실어주었다. 그곳의 방문에 동참했던 젊은 사제 지망자는 처음으로 봉사의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은 힘든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나누면서 문득 한 초등학교 동창을 떠올려 보았다. 산을 좋아했던 동창 친구는 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암벽등반을 하는 씩씩한 젊은이가 멋져 보여 좋아하게 되었고 결혼하여 아이도 둘 있다. 그런데 시간만 나면 산으로 향하던 남편이 어느 날 암벽등반을 하던 중 떨어져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었다.

꼼짝없이 누운 남편, 밀려오는 각종 공과금과 병원비,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떠맡은 그녀는 어느 날 죽을 결심을 하고 한강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 죽으려고 한강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운전하던 여자 기사를 보고 친구가 무심코 물었다고 한다.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러자 버스기사는 죽을 맘만 먹으면 뭘 못 하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날로 그녀는 버스회사를 찾아갔고 끈질기게 대형면허시험에 도전해 마침내 버스기사가 되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남편은 그 뒤 의식을 회복했고 지금은 허리에 쇠심을 박고 다시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그저 고맙다고 한다.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난이나 사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 도우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향해 걷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은 언젠가 부활의 기쁨이 될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배마리진 착한목자수녀회 수녀 한국 틴스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