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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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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문구는 이제는 세상에 다 알려져 있듯이 '살아남은 자'였다. 그는 이산해, 토정 이지함 등으로 유명한 한산 이씨의 후손이다. 그의 은근한 양반 자랑은 애초부터 나 같은 소인 '천출'로서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얘기가 빗나가지만 광주 사태 나고서 해직교수가 되었던 송기숙이 문인들 몇 사람을 꼬드겨서 난데없는 바다 낚시에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 송기숙의 장광설에 의하면 이맘때 소흑산도에 가면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라는데 초장만 가지고 가면 싱싱한 회로 아예 체질을 바꾸어 올 수 있다는 소리였다. 다른 해직교수 몇 사람도 함께 동행하고 문인들도 못 해 본 바다 낚시 따라간다고 모처럼 낚시도구 일습을 샀다. 그런데 가는 날부터 심상치 않더니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태풍 경보였다. 이 경보는 무려 두 주일 동안이나 연속적으로 계속되었고 회는커녕 멸치 꽁다리조차 못 얻어먹고 정식 명칭 가거도(可居島), 즉 사람이 살 수 있는 정도의 좁다란 섬에 갇혀 지냈다. 그러니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 얼굴을 마주 대하며 지내자니 서로 지겹기도 했지만 재담의 밑천도 떨어질 만했다. 하루는 이문구의 양반 자세에 은근히 오기가 난 송기숙이 상대방의 야코를 죽인답시고 한마디 한 적이 있다.

-얀마 너만 양반이냐, 나두 알아주는 집안이다.

-어디 송가요?

-여산 송씨다, 왜?

-뭘 한 집안인디?

-여왕이 많이 나왔지 인마.

그랬더니 이문구는 픽, 하더니 대뜸 말했다.

-허어, 납품업?

그의 아버지는 시골 지주의 장손이었지만 개화된 사람으로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이문구가 간간이 흘리는 얘기를 들으면 언제나 기관지를 한 뭉치 실어놓은 자전거가 사방으로 흩뿌리고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그리고 각 지방에서 오는 연락원들이 아버지 사랑에서 묵어가곤 했단다. 그의 부친은 남로당 보령군책으로 이미 전쟁 이전에 검거되었다가 처형된다. 그리고 손위의 두 형도 함께 총에 맞아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진 것을 주위 사람들이 건졌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인생사에 대한 얘기를 심야의 청진동 한국문학 사무실에서 둘이 소주를 나누다가 아니면 부근 빈대떡 집에 앉아서 앞 뒤 순서 없이 들었다. 이문구의 모친은 늙은 시아버지 모시고 하나 남은 자식 이문구와 더불어 몇 년 살다가 그녀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문구가 몇 년 동안 할아버지 무릎에서 소학과 명심보감을 떼면서 아마도 한산이씨 가문의 품성을 물려받았을 터이다. 누구는 이문구의 행동거지에 봉건 잔재가 짙게 묻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조선 사람의 원래 품격으로 알고 은근히 부러워했다. 그가 골수 보수주의자인 김동리의 수양아들 노릇을 했다는 것도 묘하게 생각하는 이가 많다. 나는 그에게서 김동리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게 된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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