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지향의 문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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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해 여름 베르사유 서미트 때의 일이다.「레이건」대통령은 그 자리에 모인 서방 선진국 원수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지금부터 50년 전「프랭클린·루스벨트」정부가 내놓은『첨단기술개발 예측보고서』는 텔리비전, 플라스틱, 제트기, 우주산업 등의 출현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미국에서 요즘 한 컴퓨터회사가 손바닥만한 크기의 신형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3년 동안 5천만달러(3백75역원)의 거금을 들여 개발한 이 컴퓨터는 키보드, 영상스크린, 디스크 기억장치, 소프트웨어 응용장치 등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프로그래밍만 하면 보고서작성, 재정전망, 그래픽(도표)까지 할 수 있다. 집채만한 컴퓨터시대는 벌써 옛날이다.
이른바「축소지향」현상이 일본 아닌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손재주에 능한 일본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알려진 미니 화를 덩치 큰 미국도 해낸 것이다.
축소지향이 일본인만의 장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제3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반도체 문명의 특징은 어디서나 이처럼 극소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가령 과거의 진공관 하나를 줄여놓은 것이 TR(트랜지스터)이고, IC(반도체)는 손톱 크기 만한 실리콘 판에 TR을 백 단위에서 천 단위까지 축소해 집어넣은 것이다.
LSI (대규모 IC)는 그 10배인 만 단위까지, VLSI(초대규모 IC)는 10만 내지 백만 단위까지 축소할 수 있다.
요즘 미국과 일본이 앞을 다투는 반도체 256K비트의 경우 25만6천 개의 소자를 담고 있다는 단위표시다.
전자 손목시계의 경우 두께 0·3mm, 크기 가로·세로 5mm정도의 칩을 넣고 있다. 그 속엔 8천 회로가 집적되어 있다.
만일 이 시계를 진공관으로 대체한다면 8전개를 장치해야 한다.
아마 각은 방의 네 벽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규모다.
축소지향은 어느 나라 국민만의 특기가 아니라 반도체 문명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필경 반도체가 일반화하면 인류문명의 구조 자체에도 변혁이 일어날 것 같다. 모든 기계들의 규모가 줄어들면서 이 기계를 설치하던 공간도 줄어들 것이다.
화물의 크기가 준다면 종래의 트릭이나 하물열차, 선박의 크기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연말 우리 나라 컬러 TV 값이 내렸다. 덤핑이 아니다. 일부 부품들을 반도체로 바꿔 넣은 결과였다. 첨단기술은 물건값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간의 자연관, 가치관을 크게 흔들고 있다. 19세기의 기술혁명은 이미 프래그머티즘, 유물론, 진화론 등 사상의 새로운 조류를 몰고 왔었다.
이제 21세기의 전야에 맞는 기술혁명은 양과 질에서 19세기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극미의, 세계로 축소만 되고 있는「새로운 세기말」은 거대 과학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두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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