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2년 안에 경제회복” vs “98년 디폴트 상황 재현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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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러시아 차르(황제)'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에 대한 후폭풍으로 서방의 경제제재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아래로 폭락하는 바람에 자원대국 러시아의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추락하고 인플레이션 공포로 사재기가 확산되고 있다. 4중고를 겪고 있지만 러시아는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8일 연말 기자회견에서 최근 금융 혼란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외환보유고를 한꺼번에 풀어 직접적으로 환율 방어에 나서는 것보다는 기준금리 인상 등을 통해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정부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그쳤다.

또 “아직 419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있어 국제유가가 40달러까지 하락하더라고 버틸 수 있다”며 “향후 2년 안에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낙관적인 전망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실제 그의 태도는 서방의 경제제재가 시작된 지난 4월과는 사뭇 달라졌다. 서방의 제재에 강력히 대처하고 러시아 경제에 자신감을 표시했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4월 그에게는 석유 수출로 확보한 50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뒷심으로 작용했다. 웬만한 서방 제재에도 상당기간 견딜 만한 재원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올 들어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은 60%나 빠졌다. 이로 인해 외환위기로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던 1998년의 위기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루블화 폭락을 막기 위해 외환을 투입하다 보니 외환보유고도 1년 새 900억 달러나 줄었다. 급기야 지난 15일에는 루블화 방어를 위해 전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기준금리를 이례적으로 10.5%에서 17.0%로 대폭 올렸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국제유가의 추락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재정수입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은 절반을 차지한다. 러시아의 경우 배럴당 적어도 90달러가 돼야 재정균형을 맞출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올 예산 책정 때 국제유가를 배럴당 100달러로 예측했다. 하지만 현재 유가는 60달러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정책연구기관인 애스펜 인스티튜트의 월터 아이잭슨 최고경영자(CEO)는 “푸틴 대통령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러시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내년도 러시아 경제의 앞날은 더욱 암울하다. 전문가들이 국제유가가 적어도 내년 2분기까지 추가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귀수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추가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산유국들이 감산에 합의해야 하는데 과거의 사례를 볼 때 감산 합의에는 최소 1년이 걸린다”며 “유가 60달러를 견뎌낼 수 있는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뿐”이라고 말했다. 유가의 추가하락으로 인해 러시아 경제 불안이 가중될 것이라는 의미다. 경제위기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던 러시아 정부도 이를 인정했다. 알렉세이 베데프 러시아 경제차관은 이달 초 “러시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유가 하락이 원인 중 하나”라며 “내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8%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당초 내년 성장 목표치는 1.2%였다. 심지어 러시아 중앙은행에서는 유가가 60달러 선을 유지할 경우 내년도 성장률이 -4.5%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AP통신 등은 푸틴 대통령이 향후 서방과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강경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서방 측도 당장은 러시아 옥죄기에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8일 러시아에 대한 추가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확대하는 ‘우크라이나 자유 지원법안’에 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했지만 러시아 국영기업 등에 대해 당장 제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상황을 지켜보면서 동맹국들과 협조를 통해 신중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러시아가 우리의 제재에 새로운 신호를 보낸다면 추가 제재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제재 완화를 검토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가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줄일 경우 양측의 대립은 다시 격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외신들의 전망이다.

러시아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여전히 80%를 웃돌고 있다. 외신들은 “이는 대다수 국민이 서방이 푸틴 정권을 무너뜨려 하고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만큼 푸틴 대통령으로서도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역력하다. 그는 경제난에도 불구, “2012년 집권 3기 출범 때 밝혔던 국방ㆍ교육ㆍ보건 등과 관련된 공약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현재의 경제난은 크림반도를 병합한 대가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러시아가 하나의 민족과 국가로서 존재하기 위한 노력의 대가”라고 강조했다. 또 비난의 화살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도 돌렸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나토가 동진을 계속하면서 러시아와 서방 간 불신의 벽을 만들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AP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서방의 경제제재를 자신의 인기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해온 만큼 최근 위기도 외부에서 찾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위기가 한국 등 아시아 신흥국들에 대한 영향은 그다지 크지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상훈 하나대투 연구원은 “원유 등 원자재 수출국과는 달리 한국ㆍ대만 등 수출위주의 제조업 국가들은 여전히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은 경상수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선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재발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 금융권에 대한 직접 피해는 13억6000억 달러 정도이며, 무역부문에서도 자동차와 관련 부품에 그 영향이 한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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