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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회항’ 사건으로 본 기업의 위기 관리 - 직접, 신속히, 진심 담아 사과하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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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위기는 기업과 사회가 그때까지 맺고 있던 관계가 재정립되는 계기이자 기회다. 위기가 시작되는 순간 기업은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고, 기업의 처신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업의 이미지는 달라진다. 기업에 있어 위기 상황은 재판의 과정이다.’ 전성철 IGM 세계경영연구원 회장 등이 2011년 펴낸 <위기관리 10계명>에 나오는 말이다. 이 점에서 보면 여객기 회항 사태를 둘러싼 대한항공의 초기 위기대응 관리는 완전한 실패작이다. 대응은 늦었고, 어설픈 대처는 화를 키웠다. ‘사회적 재판’을 스스로 불리한 쪽으로 몰고갔다. 사건의 당사자인 오너 일가를 감싸다가, 오히려 조현아 부사장이 퇴진하는 사태로 번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건의 발단은 12월 5일 0시 50분(미국 현지시각). 당시 미국 뉴욕 JF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KE086편 항공기에 탑승한 조현아 대항항공 부사장은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사무장을 공항에 내리도록 했다. 항공기는 예정 시간보다 20여 분 늦게 이륙했다. 항공 업계나 국토교통부에서도 ‘초유의 사례’라고 입을 모으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한국 시각으로 12월 8일 오전이다.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삽시간에 퍼졌다. 비난 여론은 거셌다. 기사마다 많게는 수천 건의 비난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대한항공의 대응은 너무 늦었다. 대한항공은 첫 보도가 나가고 15~16시간 만인 8일 밤 9시 24분에 각 언론사에 ‘입장 자료’를 보냈다. 이 사과문이 오히려 화를 키웠다. 조현아 부사장의 직접 사과도 아니었고, 내용 역시 ‘항공기 램프 리턴 사건’의 책임을 승무원들에게 돌리는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사과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비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승무원을 하기 시킨 점은 지나친 행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 드린다→(하지만) 대한항공 임원은 항공기 탑승 시 기내 서비스와 안전에 대한 점검의 의무가 있다→조현아 부사장의 문제 제기 및 지적은 당연한 일이다→철저한 교육을 통해 서비스 질을 높이겠다’.

늦은 대응, 잘못된 대처

대한항공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국내외 언론이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보도하고,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서비스의 질’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갑의 횡포’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측은 ‘사과(Care&Concern)의 방식’, ‘상황 수습 방안(Action)’ 그리고 ‘재발 방지 노력(Prevention)’이라는 ‘초기 위기관리 대응의 ABC’조차 지키지 못했다. 대한항공의 첫 사과문 발표 후 여론은 더 악화됐다.

<위기관리 10계명>에는 ‘처음 24시간이 전부다’라는 말이 나온다. 위기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수습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CEO의 진심이 담긴 사과와 대책 마련 발표는 기본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초두 효과(Primary effect)’, 쉽게 말해 ‘첫 인상 효과’라고 한다. 대한항공은 처음 24시간 대응에 실패했고,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런 사례는 많다.

지난해 5월 터진 남양유업 막말 사태가 비슷한 예다. 남양유업 영업직원이 대리점주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한 녹취록이 공개된 것은 2013년 5월 3일. 남양유업은 다음날 회사 홈페이지에 대표이사 명의로 사과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직원 한 명의 인성 문제’로 몰아간 사과문 파장은 컸다. 전국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김웅 사장을 비롯한 남양유업 경영진은 사건이 터진 후 6일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을 열고 머리 숙여 사과했지만, 너무 늦었다. 남양유업은 이른바 ‘갑질 기업’의 대명사가 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아모레퍼시픽에서 남양유업과 비슷한 막말 파문이 터졌다. 아모레퍼시픽의 대응은 달랐다. 사건이 보도된 직후, 손영철 사장은 성명을 통해 즉각 대국민 사과를 했고, 다음날 국회에 출석해 “모두 제 잘못”이라며 거듭 사과했다. 막말파문 이후 매출이 급락한 남양유업과 달리 아모레퍼시픽은 발 빠른 사과와 대응으로 위기를 넘겼다.

비슷한 시기에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도 구설수에 올랐다. 강 회장이 탑승 문제로 공항 용역직원을 신문지로 폭행한 사건이 터졌다. 이와 관련, 강 회장과 블랙야크는 첫 보도가 난 날 오후에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해 부인하지 않으며, 현장에서 사과를 했고 약 1시간 후 재차 당사자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대단히 죄송하다”는 공식 사과 성명서를 냈다. 파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회사 측은 “이번 사과문은 블랙야크 회사 차원이 아닌 강 회장의 개인적 사과문 성격”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번 대한항공의 대응과 다른 점이다.

2011년 초 연이어 터진 현대캐피탈·농협 해킹 사건도 발 빠른 위기관리 대응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같은 해 4월 12일, 농협 전산망이 마비됐다. 나중에 북한의 해킹으로 밝혀졌지만 수일 간 농협 전산 서비스는 먹통이 됐다. 농협은 사건 발생 후 3일이 지나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농협 경영진은 무성의한 자세로 사과문을 읽고, 기자들 앞에서 사내 IT담당자를 호통치는 태도를 보였다. 대책 마련은 고사하고, 사고 원인조차 발표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른 회의가 있다며 기자들의 질문을 막고 회견을 끝내려다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농협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현대캐피탈은 농협과는 달랐다. 현대캐피탈은 같은 해 4월 8일 175만명의 고객 정보가 해킹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노르웨이에 출장 중이던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은 즉시 귀국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 내용은 이랬다. ‘깊이 사과드린다→해킹의 전모를 최대한 파악 중이다→CEO 직속 안티 해킹팀을 구성하고 IT 보안을 강화하겠다→재발 방지를 약속한다’. 이후 현대캐피탈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해킹을 당한 피해 기업으로 인식됐다.

평소 평판 관리도 중요

초기 대응에 실패한 대한항공은 이후에도 위기관리 매뉴얼과는 거리가 먼 대응을 보였다. 조 부사장이 보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가, ‘무늬만 사퇴’라는 비난이 일자 사표를 제출했다. 그나마 ‘사표가 수리됐다’는 내용은 없었다. 국토교통부의 출석요구에는 ‘정신적으로 힘들다’며 1차 거부했다. 한 시민단체는 조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했고, 회사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결국 12월 12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제 여식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고, 같은 날 조현아 부사장 역시 국토부 조사 출석에 앞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사무장에게 사과하고 모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후 7일, 언론 공개 후 5일 만이다.

<위기관리 10계명>에 나오는 마지막 계명은 ‘끝맺음을 잘하라’는 것이다. 대한항공이 이 위기의 끝맺음을 어떻게 할지에 따라, 기업 이미지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또 한가지. 대한항공 회항 사태 후 회사 안팎에서는 ‘조 부사장이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한항공 임직원이나 기자들 사이에선 ‘그럴 줄 알았다’‘터질 게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경영진에게는 평소 평판 관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글 =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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