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깊이보기 : 과거사 청산-세계 사례의 교훈

프랑스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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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나치 강점기 하의 대독 부역자에 대한 대규모 인적 청산 작업이 이루어졌다. 총 12만 명 이상의 부역 혐의자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고, 그중 약 10만 명이 사형, 금고형, 공민권 박탈 등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청산은 일제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남은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흔히 사법적 처벌을 통한 인적 청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청산 과정에서 표출된 몇 가지 문제로 인해 당초 기대와 달리,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완의 애도'에 머물렀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해방 후 혼란 와중에서 청산해야 할 과거사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부역자 처벌의 법적인 근거는 형법 75조로 '적과의 내통', 즉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만 처벌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독일의 위성 정권이었던 비시 체제에서 일어난 대독 부역 행위의 일부분에만 적용될 따름이다.

이러한 과거사 규정은 분열된 국민적 정체성 회복에는 유용할지 모르나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과 관련, 비시 체제와 부역자들이 자발적으로 수행한 역할을 명료하게 규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을 포함해 많은 국민이 파시즘에 매료됐던 현상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실종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 '반인륜적 범죄'라는 죄목으로 나치 강점기 유대인 박해에 협력한 인사들을 연이어 재판정에 세운 것은 철저한 과거 청산의 일환이라기보다는, 1차 청산과정에서 누락된 과거사의 중요 부분을 뒤늦게나마 청산해야 할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점은 인적 숙청 과정에서 공정성과 형평성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지스탕스 출신 인사들이 청산의 주체로 활약함에 따라 대독 부역과 관련된 혐의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나 개인적 갈등이 인적 청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또 부문별 혹은 계층별로 처벌 강도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 역시 많은 사람이 과거사 청산에 실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독일군에 군수품을 납품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긴 기업가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반면, 그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는 중형에 처해지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청산 강도가 급격히 약화되는 현상도 형평성과 관련해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대독 부역자 청산이 "법적인 형식을 취한 혁명적 행위로, 본질상 혁명가도 법률가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조치"라는 레이몽 아롱의 지적은 이러한 한계들을 적절하게 요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진현(상명대 교수.프랑스어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