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도 영광스러운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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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15일 하오3시. 연일을 두고 쌀쌀하던 날씨가 제법 풀려서 포근했다. 이 날은 중앙일보사가 제겅한 「시조대상」의 제l회 수상식이 있던 날이요, 또 누구 아닌 필자가 바로 그자리에 수상자로 서게 된 날이었다.
상도 여느 상이 아닌, 우리 겨레만이 가진 시조의 「대상」이란데서 더욱 영광스러웠고, 그 영광스러움이 차라리 외롭기까지 하였다. 구차한 말씀이지만, 만일 필자에게 그 상의 심사를 맡겼더라면 필자는 아예 수상자의 대상에 올랐을리도 없고, 또 설령 올랐다 하더라도 사양하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필자의 이름이 심사위원의 명단에서는 빠지고. 뜻밖에도 그 영광이 필자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참으로 뜻밖인 일이다.
이 수상소감을 읽으시는 독자께서는 앞에서 필자가 「시조대상」을 일컬어 「외롭고 영광되다」는 말에 대해 더러는 의아히 여기실 분이 없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세상에서 참으로 영광된 것은 참으로 외롭지않을수 없다는 것이 필자- 평생의 소신인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시란 한갓 무용한것인지도 모른다. 시가 없다고해서 사람이 못살것은 없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고, 또 시는 더욱 따돌림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아닌 그 어떠한 생명체도 일찌기 이 시를 가진 적은 없었다. 해서 사람과 여타의 생물을 구별함에 있어서 시는 적어도 그 증표가 될수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중에서도 더더욱 의로운 것은 시조라는 우리겨례 고유의 시다. 이 시조가 현재시단에서까지 고립된 형편에 있는 것은 우리 시단 자체의 지각에도 문제는 있겠지만, 그보다 시조를 쓰는 이른바 「시조시인」들, 그들의 작품에도 시적성공 여부로서 더욱 큰 문제성을 안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최근 신문보도에 의하면 우리 문단의 명망있는 세사람의 문인이 북구의 먼나라 스웨덴과 핀란드의 문인들과 교환하고 돌아와 보고한 글을 읽었다. 한데 그 글중엔 우리나라에서 「시조의 전통이 유지되고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는것이다.
국내에서도 소위 역량있는 시인들조차 시조를 경원하고 무시하는 형편인데 멀리 북구에서 「시조의 안부」를룰 물어왔다는것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는 모든 생물중에 오직 인간만이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시조는 한국인만이 가진 시라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시조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곧 참된 한국인으로서 스스로에 복귀하는 일이라고 필자는 믿고있는것이다.
본디 시조는 멀리 신라 향가에서 그 연원을 찾을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시가의 형식이 터를 잡기 시작하여, 고려말기에 와서 비로소 시조로서 정형되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6백년을 두고 면면히 이어왔던 것이다.
스웨덴에서 「시조의 안부」를 물었을 때, 우리 문인들은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 필자는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어떤 연유에서든 이토록 외로와진 우리 시조! 하마터면 숨을 거둘뻔 했던 우리 시조, 이 시조가 다행히 중앙일보사에 의해서 솔선 부활운동으로 불붙기 시각했다. 이는 참으로 고맙고 기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 뜻이 옳고 보람된 일이라 할지라도 진행과정에서 그 방향을 자칫 잘못잡으면 한갓 복고주의에 흐를 염려가 없지않다.
이런 때에 제1회 영광의 「시조대상」은 지난날의 필자를 찬양하기 보다 앞으로의 기대에 수반하는 것일진대 필자로선 심히 감당키 어려운 고롱이 따른다.
그러나 중앙일보사가 이 운동을 부활에서 부흥으로 확산시키고, 또 시단에 예속된 시가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시로서 꽃피우기를 작정한 바엔 그 결실을 간절히 같구하는 바이다. 이 일에 비록 미흡하나마 필자의 재주와 구상이 수용된다면 언제든지 필자는 한사람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대기하고 있을 것을 약속한다.
끝으로 한 나라의 문화창업에 횃불을 든 중앙매스컴에 경의를 표한다. 김상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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