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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건집 회장 “내게 차는 님…마음을 다스리는데 이만한 것 없어”

중앙일보

입력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차(茶)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다산 다인상(茶人賞)’의 올해 (5회) 수상자는 심수연학회(心水硏學會) 회장과 서산포럼 지도교수를 맡고 있는 류건집(77) 전 원광디지털대 석좌교수다.

그는『한국차문화사』등을 비롯한 10여 권의 저서와 ‘다부(茶賦)에 나타난 이목(李穆)의 차 정신’을 비롯한 20여 편의 논문, 강연을 통해 한국의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이 상을 받게 됐다.

다산 다인상은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장의순 등과 차를 통한 교류를 즐겼던 다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 다산은 저서『경세유표』에서 ‘양질의 차를 생산해 무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차에 대한 관싱이 컸다. 류 회장은 1995년 경전과 다서(茶書)에 관한 강의와 토론을 하는 심수연학회를 설립했고, 2003년에는 자신의 호(서산·曙山)를 딴 다도 모임인 서산포럼을 이끌고 있다. 사단법인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에서 수여하는 다인상은 2010년 1회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에 이어 서양원 한국제다 대표, 이미자 부산차문화진흥원 회장 등이 수상했다.

류건집 회장을 만나기 위해 13일 서울 청담동 자택을 찾아갔다. 거실에서 마주한 그의 다기(茶器)는 무척 소박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 받침 위에 작은 찻주전자와 다구, 찻잔 두 개가 전부다. “오십 년 넘게 차를 즐기고 연구해 온 분의 다기로는 너무 검소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류 회장은 “사람이 차를 마셔야지 차가 사람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값비싼 차나 유명인이 만든 다기에 신경 쓰다보면 정작 차의 향이나 맛을 즐길 여유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활다례를 이야기했다. 차는 너무 격식을 따지기보다는 편하게 단정하게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공연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차 문화와 달리 우리의 차 문화는 예로부터 생활의 일부라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데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하는 고가의 다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가 빠진 다기라도 정성이 있으면 됩니다. 공연적 성격의 일본 차 문화 유습은 버려야 합니다. 차를 마시는데 무릎을 꿇는 것 같은 자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복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편하게 차의 맛과 향을 즐기면 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그는 ‘세작’를 즐겨 마신다고 했다. 녹차는 채취시기에 따라 곡우(4월20일경) 전후로 어린 잎을 딴 ‘우전’, 입하 (5월5일경) 전후에 딴 ‘세작’, 5월5~10일 즈음에 딴 '중작', 5월11~20일 즈음에 딴 ‘대작’으로 나뉜다. “우전은 달콤하지만 깊은 맛은 떨어져요. 세작은 우전보다 좀 더 자란 것인데 쌉싸름하고 쓰면서도 떫은 맛이 제게는 좋습니다.”

조지훈 선생에게 배운 차도

류 회장과 차와의 인연은 20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학창 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했다. 홀로 등산장비를 메고 전국 각지의 산을 다니며 산사의 스님들과 차를 자주 마셨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스님들과의 차와 인생 이야기는 새벽이 가까워 와서야 끝나곤 했다는 것이다.

시인 조지훈(趙芝薰ㆍ1920~1968) 선생과의 인연도 이야기했다. “대학 졸업 즈음에 서울 삼선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인근에 있는 동향(경북) 선배인 지훈 선생댁을 지인들과 함께 들른 적이 있습니다. 문학과 고향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선생께서 손수 달여 내 준 차와 차에 관한 선생의 식견”이라고 했다. “그렇게 접하게 된 차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어가다 보니 직접 연구에 까지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70년대 고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차 학술 모임을 만들어 이끌었고, 연구활동을 하며 원광대ㆍ동국대에서 차에 관한 강의를 했다.

“50년 넘게 빠져 있는 차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古來聖賢俱愛茶(고래성현구애다) 茶如君子性無邪(다여군자성무사)’란 글씨를 써보였다. 차를 즐겼던 초의선사의 말씀으로 ‘예로부터 성현들은 차를 사랑했는데 차는 군자와 같아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란 뜻이다. “차의 특징인 뿌리를 곧게 내리고, 항상 주변이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군자의 자세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佳茗似佳人(가명사가인)’이란 말도 썼다.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는 의미다. “저한테 차는 ‘님’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이지요. 제게 그리운 것은 다 님입니다. 차와 함께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지요. 차를 나누는 것은 단순히 차 한 잔이 아니라 마음의 한 조각을 나누는 것입니다.”

한 잔의 차로 여유 찾는 삶 필요

다인으로서 그는 뒤처진 우리의 차 산업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우리나라에 산업적 차원에서의 차 전문가가 없습니다. 관련 행사라야 일회성이 대부분이고 정부의 제대로 된 육성책도 부족하지요.” 전 세계적으로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차를 산업으로 육성해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도 품종 개량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나라는 개인 적 차원에서 일부 이뤄지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정부가 나서야지요. 유통구조도 개선해야 하고요.”

일반인들도 차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시중에 많이 나와있는 1회용 티백부터 서울 인사동 등지에 있는 차 전문 업소에서 판매하는 것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나와 있는 만큼 이들 가운데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찾아 즐기면 된다고 했다. “어떤 것이 좋은 차냐”는 물음엔 “정성껏 만들어 낸 차, 향이 오래가는 차, 목 넘김이 좋은 차”라고 설명했다.

그는“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격렬하다”고 했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차 한잔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특히 초·중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다도교육을 실시하면 성품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술자리가 이어지는 연말 연시에 술 대신 차 모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권했다. “술은 감각적이고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차는 반대지요. 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회복시킵니다. 그렇다고 술과 차가 원수지간은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 같지요. 저는 차를 좋아하지만 술도 좋아합니다. 적절히 조화시켜야지요.” 앞으로 일반인들에게 차를 널리 알리는 작업에 주력하겠다는 그의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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