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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시대를 앞서 간 거인, 옌푸(嚴復)의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옌푸(1854~1921 *음력 1853년 생)에게는 ‘최초’ 또는 ‘제1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최초의 영국 유학생, 서양 학술? 사상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인물, 번역계의 태두, 통유석학(通儒碩學)과 같은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중국과 서양의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란 의미로, ‘중서겸통(中西兼通)’으로도 불렸다.

후학들은 그를 중국 근대사상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한다. 옌푸는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의 참패, 변법유신운동의 실패, 의화단 운동과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신해혁명, 1차 세계대전, 5? 4운동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을 몸소 겪었다. 시대의 아픔은 그에게 좌절과 기회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시대의 격랑을 맞아, 때로는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표류하기도 했던 옌푸의 영욕의 삶을 들여다보자.

중국에서 옌푸에 대한 연구는 넘쳐난다.《옌푸집(嚴復集)》을 포함해 전집류만도 여러 종류가 존재한다. 2000년대 들어서도 옌푸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식지 않았다. 뤄빙량(羅炳良)이 엮은《옌푸 천연론(嚴復 天演論)》, 리신위(李新宇)가 지은《불을 훔친자 옌푸(盜火者 嚴復), 2010, 화하(華夏)출판사》등이 눈에 띤다. 하버드 대학 교수, 벤저민 슈워츠(Benjamin Schwartz)의 <《In Search of Wealth and Power : Yanfu and the West, 최효선 역,《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이미 옌푸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2008년에 양일모의《옌푸 :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사상》이 단행본으로 출간돼 주목을 받았다.

옌푸의 발자취

옌푸는 푸젠성(福建省) 허우관(侯官, 현 푸저우시福州市 일부) 출신으로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아적 이름은 체건(體乾)이었으며, 자라서는 촨추(傳初)에 이어, 다시 쫑광(宗光)으로 바꿨다.

옌푸는 사서오경을 외우면서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키웠다. 만 12세 되던 1866년에 혼례를 치렀으며, 그 해 와병 중이던 부친, 엄진선(嚴振先)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후, 가세가 기울자 편안히 책상에 앉아 공부할 형편이 못됐다. 같은 해에 푸저우에 위치한 선정학당(船政學堂 *5년제 해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선정국 부설 학교로서 학비가 면제됨은 물론 생활비도 지급됐다.

이 학교는 항해술, 조선 기술 분야 인재를 양성하는 일종의 기술학교였다. 이곳에서 영어? 항해술?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을 배웠으며 1871년에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다음 해 이름을 옌푸로 바꾸고, 자를 기도(幾道)라 하였다. 졸업 후 5년 동안 군함, 건위(建威)? 양무(揚武)호에 승선하여 해군 항해사로서의 자질과 기본을 익혔다.

1877년, 처자식을 남겨둔 채 고달픈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왕립 해군사관학교(The Royal Naval Academy)에서 항해술 등을 익히고 2년 뒤 귀국하여 선정학당으로 돌아왔다.

1880년, 옌푸는 리훙장의 부름을 받아 갓 창설된 북양 수사학당의 총교습(總敎習,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학교의 창설 요원으로서 학생 모집, 교과과정 편성 등 폭주하는 일로 분주하게 지냈다.

1884년 뜻밖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프랑스와 벌인 해전에서 푸젠성 일대를 지키는 남양해군이 전멸하였다. 옌푸의 선정학당 출신 동료, 후배들 상당수가 전사하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하였다.

1890년 옌푸는 총판(總辦,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결코 총판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했다. ‘부국강병’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펼치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입지가 좁았다. 과거에 급제한 진사 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한 사회에서 이 최초의 영국 유학생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옌푸는 권력 핵심부에 진입하여 꿈을 펼치고자 과거(科擧)의 문을 두드렸다. 30대 초반부터 10 년 가까이 모두 4차례 응시하였으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만 것이다. 관직생활에 대한 염증과 암울한 현실을 달래기 위해 아편에 손을 댔다. 옌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무기력하게 패하자 과거 응시에 미련을 버렸다.

청일전쟁(1894~1895)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 동양 최대의 위용을 자랑하던 양무파 리훙장의 북양함대는 서서히 침몰하였다. 정관잉(鄭觀應)의 표현대로, ‘총알 만한 크기의’ 섬나라에 완패하자 중국의 자존심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인민은 집단 무기력증에 빠졌다. 이 해전에서 옌푸가 고혈을 바쳐 길러낸 북양 수사학당 제자 대다수가 수장됐다. 옌푸는 밤새 통곡하였으며 울분과 좌절의 나날을 보냈다. 아편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전화(戰禍)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00년, 수사학당이 8개국 연합군의 집중포격으로 불에 타자, 옌푸는 둥지를 잃고 잠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1901년 광산 개발 사업에도 손을 댔으며, 톈진에 있는 개평 광무국(開平 ?務局) 총판을 지냈다. 이어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베이징 대학 전신) 부설 역서국(譯書局) 책임자, 상하이 푸단공학(復旦公學, 현 푸단대학 전신) 교장을 역임했다.

1910년 청 정부에서 ‘문과 진사’ 칭호를 하사했으며, 해군부에서 협도통(協都統 *해군 소장급)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오래도록 갈망했던 진사와 해군 제독의 꿈을 모두 이루었다. 1912년, 베이징 대학 초대교장을 지낸 뒤 이듬해 위안스카이 총통부의 외교? 법률고문으로 부름을 받았다. 1915년에 중화민국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급사하자, 화를 피해 톈진으로 도피하였다. 위안스카이? 장쉰(張勳)의 복벽(復?, 군주제 부활)에 공감하였으나 5? 4 신문화 운동에는 등을 돌렸다. 1921년 푸저우에서 천식이 도져 향년 69 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오래도록 아편에 손을 댔고 좀처럼 끊지 못하였다. 그의 죽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측근 의사는 전한다.

언론인, 번역가 그리고 정치가의 길

옌푸는 언론 활동, 강연, 저술 및 번역 작업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민주? 과학? 공리? 평등? 사회진화론? 입헌군주제 등 서구의 제도와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1895년 무렵부터 다수의 논설을 발표하며, 변법유신운동의 이론가요, 선전가로 활동했다.

1897년에 톈진에서 일간지《국문보(國聞報)》와 자매지,《국문휘편(國聞彙編)》을 창간하였다. 옌푸는 스펜서를 정신적 스승으로 섬겼다. 스펜서, 헉슬리의 저작과 견해들이 지면에 소개됐다. 이 보다 1년 앞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상하이에서《시무보(時務報)》를 발간하여 변법유신을 널리 알렸다. 남과 북에서 동시에 ‘변법자강’의 포문을 연 것이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옌푸는 초인적인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번역과의 고독한 싸움을 즐겼다. 마침내 모두 7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아담 스미스의《국부론(原富)》, 스펜서의《사회학 연구(群學肄言)》, 존 스튜어트 밀의《자유론(群己權界論)》과 《논리학 체계(名學)》, 에드워드 젠크스의《정치학사(社會通詮)》, 몽테스키외의《법의정신(法意)》, 제본스의《논리학 입문(名學淺說)》을 번역했다. 특히,《법의 정신》한 권을 번역하는 데만 6년 넘게 걸렸다.

1913년에 공교회(孔敎會)를 발기하고 이끌었다. 공자를 받들고 경전을 학습하자는, 이른바 ‘존공독경(尊孔讀經)’을 극력 제창하였다. 서구적 가치인 민주와 과학에서 진리를 발견하려 던 초심을 버리고 ‘수구(守舊)’로 선회한 것이다.

유혈혁명을 줄곧 반대했던 옌푸는 신해혁명 이후, 야심가 위안스카이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1912년,《평보(平報)》에 <국민이 정부를 지나치게 책망해서는 안 되는 까닭을 논함(論國民責望政府不宜過深>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위안스카이 정권을 적극 감쌌다. 1915년에 주안회(籌安會 *위안스카이 황제 추대 지지 모임) 발기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몇 편의 주요 논설에 대해 살펴보자. 옌푸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직후에 변법자강을 도모하는 일련의 글을 기고하였다. 1895년, 천진에서《직보(直報)》상에 <원강(原强)>, <세계 변화의 빠름을 논함(논세변지극(論世變之?)>, <벽한 闢韓 *벽은 반박의 뜻>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원강>에서, 국가 존망은 인민의 지? 덕? 체 함양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아편 및 전족 금지, 인민의 기백 고양, 서구적 지식과 원리 학습, ‘존민(尊民)’의식 고취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세계 변화의 빠름을 논함>에서 중국과 서양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중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리나, 서양은 공(公)으로 다스린다. 중국은 군자를 받들고 서양은 인민을 받든다. 중국은 전체적 통일성을 중시하나, 서양은 개성을 중시한다. 중국에는 금기가 많고 서양에는 비판이 많다. …중국인은 박식을 자랑하나, 서양인은 신지식을 높이 평가한다<양일모,《옌푸 :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사상》,113~115>.

국가부흥을 위해, 자유? 공리? 비판? 개성 등 서양의 가치와 관념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제창하였다. 옌푸는 봉건 군주제에도 회의를 품었다. <벽한>에서, 옌푸는 한유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어찌하여 위에서 당당히 군림하는 자가 있어 수탈하면서 살아가고, 명령을 내려 부리고, 생산물을 따지면서 처벌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학대하여 원수가 되는 일이 생겨날까? 군신의 윤리는 부득이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득이함이라는 점에서 도(道)의 근원이 될 수 없다. …한유는 군신의 윤리를 천지와 함께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도를 아는 자라 할 수 있을까? (위의 책, 143)

옌푸는 군신윤리가 절대불변의 가치임을 내세운 한유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군신관계의 완전한 폐기는 불가능하다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청일전쟁의 참패는 곧 양무파가 내건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파산을 의미했다. 양무파가 길러낸 상징적인 인재 옌푸는, 1902년에 쓴 <외교보 주간에게 보내는 편지(與外交報主人書)>에서 중체서용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소라는 체(體)가 있으면, 무거운 짐을 지는 용(用)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체가 있으면, 멀리 가는 용이 있습니다.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는 각기 체와 용이 존재합니다. …중국의 학문을 기본으로 하고, 부족한 부분은 서양의 학문으로 보충한다는 주장은, 얼핏 듣기에 지극이 옳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논리학? 수학? 화학? 물리학 네 가지는 모두 과학입니다. 이들 학문의 진리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합니다. 의학? 농학? 광물학? 약학? 교통? 군대는 모두 부강의 바탕입니다. 중국이 이러한 것들을 모방하였으나 실패한 이유는 위정자들이 과학에 무지했기 때문입니다(위의 책, 173~175)."

1902년에 쓴 <주인과 손님의 논쟁(主客評議)>에서, 의화단 운동을 “요망한 인민과 도적 같은 병사의 준동”이라며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아울러, 위 글에서 구파와 신파 모두를 질타하였다.

"…봉건제도, 문물, 풍속은 장기간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어찌 한 두 명의 불분명한 주장과 거사로써 유혈을 불러 자유의 나무에 피를 뿌리고자 하는가! 그대들의 계획이 좋지 못한 것이요, 또한 나라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이니 이중으로 슬픈 일이다 (위의 책, 214). "

옌푸는 주인의 입장에서 구파와 신파 두 손님의, 수구적 태도와 급진적 혁명 노선을 모두 비판하였다.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이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쑨원이 이끄는 혁명파로 부터 배척을 당했다. 우연히 영국에서 만난 쑨원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1904년에 개평 광무국 소송사건이 불거져 교섭 차 런던에 파견됐다. 다음 해 이곳에서 쑨원(孫文)과 조우하였다. 옌푸가 교육과 계몽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힘주어 말하자, 쑨원은 그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얼마나 오랫동안 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릴 수 있겠소? 선생은 사상가지만, 나는 행동가요(벤저민 슈워츠, 앞의 책, 201)."

《천연론(天演論)》과 백암 박은식

옌푸를 말할 때,《천연론)》을 빼놓을 수 없다. 헉슬리의《진화와 윤리학(Evolution and Ethics and Other Essays)》을 번역한 책이 바로《천연론》이다. 이 작품은 옌푸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896년에 초고가 완성됐으며 2년 뒤에 출간됐다.

옌푸는 번역을 하는 동안 단어와의 ‘사투’를 벌였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열흘 혹은 한 달을 고민하였다.”며 번역의 고통을 토로하였다. 그가 번역의 원칙으로 제시한, ‘신(信)’, ‘달(達)’, ‘아(雅)’는 세 글자는 후세 번역가들의 전범이 되었다. 이른바 유명한 ‘삼자경(三字經)’이다.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해야 하며(信),
물 흐르듯 의미가 전달돼야 하고(達),
문장은 아름답고 우아해야 한다(雅) <출처 :《천연론》 번역 범례>.

《천연론》은 진화의 관념을 체계적으로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번역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판을 거듭하며 출판계를 석권했다. 진화를 뜻하는 ‘천연’이란 단어는 적자생존, 생존경쟁, 우승열패(優勝劣敗), 약육강식 등과 더불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용어가 됐다.

옌푸는《천연론》초고를 20대의 샛별, 량치차오에게 보내 감수를 의뢰하였다. 초고를 읽고 감격한 량치차오는 정중히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띄웠다.

"지금 천하에서 자신을 알아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자는, 부친과 스승을 빼고는 옌푸 선생밖에 없다(위의 책, 89)."

이를 계기로 스무 살 아래인 량치차오(梁啓超)와 의기투합하여, 오래도록 흉금을 터놓고 지냈다.

차이위안페이? 루쉰? 후스<胡適 * 원래 이름은 훙싱洪?(x?ng)과 쓰먼嗣?(men), '적適'은 적자생존의 의미) 그리고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선각자들은 '천연'의 마력에 열광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은 우승열패가 초래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열강에 의해 중국이 과분(瓜分)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천연’ 두 글자는 중국인의 뇌리에만 각인된 것이 아니었다.< p>

‘천연’이라는 글자에 김택영(金澤榮)? 박은식? 신채호? 장지연? 현채(玄采 *번역 사학史學의 대가) 등도 매료됐다. 옌푸의《천연론》은 약소국 지식인들에게 한 줄기 불빛이었다. 박은식은《대한자강회 월보》, 제 4호 <자강능부의 문답(自强能否의 問答)>에서 ‘천연’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였다.

“현금의 시대는 생존경쟁을 ‘천연(天演)’이라 논하며, 약육강식을 공례(公例)라 말하는 지라 (위의 책, 55)."

진사출신이자 저명한 문인, 창강(滄江) 김택영(김택영 1850~1927) 선생은 망명지인 통저우(通州, 현 장쑤성 난통시南通市)에서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옌푸 일기에 의하면 1909년 창강은 상하이에서 옌푸와 두 차례 만났다고 한다. 두 우국지사 간에 과연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

캉여우웨이(康有爲), 후스, 마오쩌둥, 그리고 벤저민 슈워츠에 이르기까지, 동 시대인 및 후학들의 옌푸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다. 아마 마오쩌둥의 말처럼, 서구적 가치에서 진리를 발견하려 했던 자세와 선구자적 업적 때문일 것이다.

옌푸는 군인? 언론인? 번역가? 학자? 광산개발 사업가? 교육자? 정치가로서의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가 실현하려 했던 부국강병의 꿈은 미완에 그쳤지만, 학문과 권력, 명예를 한 몸에 누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평생 봉건 청조의 은택과 시혜를 입었다. 목을 걸고 투쟁하던 혁명파의 입장에서 보면, 양지를 지향한 기회주의적인 삶이었다. 이러한 행보를 보인 것을 두고 그의 우유부단한 기질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만년에 옌푸는 1차 대전의 참극을 지켜보면서 서구적 원리와 관념에 깊은 회의를 품었다. 진화론자에서 ‘공자 추종자’를 거쳐, 점차 불교? 노장사상에 빠져들었으며, 죽음에 임박해서는《장자》에 탐닉하였다. 그의 지적 편력, 지적방황은 그칠 줄 몰랐다. 이를 두고 그를 수구주의자로 매도해서는 진면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라는 말처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지식인의 여정으로 그의 삶을 관조(觀照)해야 할 것이다.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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