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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들어서면서 「양」에서 「질」로|한국인의 실생활 변천 유태종·김숙희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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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 식생활 습관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영양결핍시대에서 점차 영양과잉과 영양결핍의 공존시대로 변화하면서 식생활 구조개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간 육류소비 구조개선을 위한 논고집은 식생활의 변천에 따른 영양섭취 문제를 다루고 육류소비현황 및 곡류위주 식습관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김숙희교수(이대·식품영양학과)의 「우리나라 식생활의 변천」과 유태종교수(고대·식품공학)의 「한국인의 식생활 구조분석과 개선방안」을 간추려 소개한다.
김교수는 이조 말, 일제때부터 해방당시, 6·25전장까지의 우리나라 영양문제는 주로 영양소 결핍증의 치료에 관심을 쏟아 특히 어린이의 성장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고 전제, 『영양섭취량의 95%이상을 식물성 식품에서 섭취했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나라 식사는 밥을 먹기 위한 식단으로 반찬은 간을 맞추는 구실에 지나지 않아 밥에다 짠 김치·장아찌류·젓갈류를 조화시켜 밥으로 배를 불리는 식습관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그 결과 소금의 섭취량은 서구인에 비해 월등히 높아 짠맛이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쌀의 수확이 떨어지는 「보릿고개」가 연중 가장 배고픈 시기로 명명되기도 했다.
한편 고기를 먹기 시작한 기록은 중국 한대의 호화로운 잔치상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고기구이가 놓여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추측되는 데, 먹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고기 구이인 「설야면적」이 미국의 스테이크와 버금가 두께2∼3cm, 길이 20cm, 너비 7∼8cm의 고기를 조치에 끼워서 소금과 기름·간장·술·식초·파·마늘·후추를 발라 불에 구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종료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식습관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6·25전쟁을 통해 서민들에게도 서구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져 통조림식품의 도입을 시발로 가공식품과 인스턴트식품, 급기야 빵·과일주스· 코피 등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0년대 이후에는 곡류섭취 억제가 정책적으로 주장되는 가운데 식사내용이 양에서 질로 변화, 육·어류 소비량의 증가와 고추·마늘·참기름류의 양념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 현재는 식품섭취의 감소를 위해 노력할 정도로 균형식단에 중점을 두는 형편.
사교적 측면에서 식생활 변천 또한 개인접시·단체급식·외식의 증가로 사적인 측면에서 공적인 대량 단체 급식형태로 정착화 되고 있다.
한국음식의 흐름을 다룬 유교수는 『피와 기장을 최초의 농경물로 경작한 이래 BC 1∼2세기께에 벼농사를 시작했고 삼국시대에는 채소류도 재배, 이때부터 주식과 부식이 구별되어 한국식품의 기본구조가 형성되었다』고 전제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이 억제된 반면 차와 나박김치·무우짠지가 선을 보였고 조선시대에는 농경기술이 발달, 고추·호박·고구마·감자가 전래된 것을 비롯해 어패류의 가공이 시각되었다. 김치류에 젓갈을 사용한 것도 중기이후 고추의 보급으로 유래되었다.
한편 쌀과 보리의 소비량은 1인당 쌀소비량이 65년 1백21.8kg에서 79년에는 1백35.6kg으로 증가한 반면, 보리쌀은 65년 36.8kg에서 79년 14.1kg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육류는 1인 하루 공급량이 67년 20g 미만에서 78년에는 30g, 79년에는38·1g으로 증가. 특히 쇠고기의 경우 78년 1인 1년에 3kg을 초과했다.
1인 1년간 식품공급은 구미와 비교해 볼 때 곡류·콩류·어패류는 많은 편이나 당질·과일·육류·우유에 있어서는 지극히 낮아 곡류 공급량이 1백92.4kg으로 쌀을 주식으로 사용하는 어느 국가보다 높다.
그 곁과 가격면으로나 영양가면으로 계란류가 효율적인 식품으로 대두되고 있고 식품의 가공·저장법이 식량의 제2생산 측면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육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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