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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신의를 지키며…」-이란사태 팔레비의 시련(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79년1윌4일, 나는 프랑스, 영국, 서독 등 서방3개국 지도자들과의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과들루프섬(주=서인도양의 섬·불령) 에 갔다.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나는 이란위기를 처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했다.「밴스」국무장관은 테헤란의 상황을 지켜보도록「먼데일」부통령과 함께 워싱턴에 남아있게 했다.
나는 그들에게「샤」의 입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해두었다.
그 무렵 이란주재「설리번」대사의 태도 때문에 나는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는「샤」 가 지체하지 않고 양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는 아주 신경과민이 되어「팔레비」국왕이 자신의 면담신청을 거부한다고 때때로 나에게 보고하곤 했다. 나는 여전히「설리번」대사의 현지보고의 일부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보고들은 정확하지도 않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설리번」은 비록 수상에 지명된「박티아르」와 그가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연립정부를 약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이「호메이니」를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설리번보고 부정확>
이란의 거부는 계속 「샤」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형태로든「호메이니」 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의향을 갖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군부의 태도에 대한「설리번」의 보고는 내가 이란에 파견한「호이저」장군의 보고와 때론 상충했다. 이란의 상황이 아주 혼돈상태였으며 군부지도자들의 의견도 한결같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나는 여러 의견을 고루 듣기를 바랐다. 결국 나는「호이저」장군의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다.
-군부의 몇몇 최고지도자들이「설리번」 대사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우리는「샤」가 이란을 떠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란의 한섬에 그를 유배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인수한다옴 숙청을 단행하고 폭력을 뿌리뽑을 것입니다.「박티아르」 는 명목상의 정부를 구성할 수는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명목상의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설리번」의 견해로는「샤」가 이런 계획에 관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리츠」(「먼데일」부통령)는「샤」가 아마 그 계획을 지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사이」(「밴스」국무)는 그러한 움직임을 저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나는「사이」에게 우리와「샤」및 이란군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시킬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군부가 주요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면 어떤 형태의 정부가 출현할지 예견할 수 없으므로「샤」와 군부는 장차 우리와 이란과의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두 동맹체이기 때문이다. <일기 l979년1월4일>
나는「설리번」대사에게 즉시「샤」를 만나 군부의 그런 계획에 대한국왕의 태도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밴스」 국무장관은 우리가 「박티아르」를 지지하고 군부 및「샤」쪽엔 편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샤」 와 군부, 그리고「박티아르」가 서로 협력하여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불,「호」옹 추방검토>
이튿날 아침 「설리번」을 만난 「샤」는 자신이 군부지도자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억류시킬 계획을 갖고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박티아르」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란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샤」는 또 군사쿠데타를 고려했던 인물들이「박티아르」정부를 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지만 만약 그가 실패할 경우 정권을 인수할 채비를 하고있다고 일러주었다.,
한편 군부지도자들을 만난「호이저」장군은 그들이 진정으로「박티아르」를 지지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또 군부지도자들은 이란의 각 정치세력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미국과의 공공연한 관계유지를 될수록 꺼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파들루프회담에 참석한 서방3개국의 정상들이「샤」를 거의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들은 모두 민간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샤」가 가능하면 빨리 이란을 떠나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가 계속 강력하고 단결돼 있어야하며「호메이니」와 혁명분자들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은 나와 같았다.
「지스카르」대통령은 프랑스가 분쟁의 발상지와 혁명세력들의 무대가 되지 않도록「호메이니」를 추방해야겠다고 일찌기 결심했었노라고 밝혔다.
그러나「샤」는「호메이니」를 파리에 묶어두는 편이 그를 이라크나 리비아 등 더 큰 골칫거리를 만들 수 있는 나라로 가게 하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고「지스카르」가 털어놓았다.
내가 워싱턴으로 돌아오자「설리번」대사는 우리가 파리에 있는「호메이니」를 직접 찾아가 그와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나는 그 제의를 거부했다. 왜냐하면「호메이니」와 의 관계형성은 그가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한 이란의 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나는「지스카르」대통령에게「호메이니」가「박티아르」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응답은「박티아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종전주장의 되풀이였다.「설리번」은 분명 자제력을 잃고있었다.1월10일 그는「밴스」에게 무례한 표현의 전문을 보내 우리가 직접「호메이니」와 접촉하지 않고 그 일을 프랑스대통령에게 맡긴 것을 비난했다. 그는「매우 중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든가,「이해 할 수 없다」는 따위의 어휘를 사용했다. 그는 복잡한 이란사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능력을 잃은 것 같았다.

<사다트, 팔레비 초청>
나는 그가 나의 지시를 마지못해 따르고 있음을 깨닫고 국무장관에게「설리번」을 경질하라고 일렀다. 그러나「밴스」는 위기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실책이 될 것이라고 나의 의견에 반대했다. 나는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지만 그때 이후론「호이저」장군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장군은「샤」 통치의 최후시기에 가능한 한 테헤란의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나에게 언제나 올바른 견해를 보고해 왔다(「설리번」은1979년 봄에 사임했다).
「박티아르」는「샤」가 1월16일 이란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 했다. 나는「샤」가 이집트에 잠시 들러「사다트」대통령을 만난 뒤 곧장 미국으로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사다트」대통령은 이에 앞서「샤」 에게 이집트에 와 머물라고 공개 초청했었다.
1윌12일「호메이니」는 「샤」 가 출국하고 나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는 그가 프랑스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이란의 새 정부가 질서를 회복하여 파업을 종식시켜줄 것을 기대하고있었다.
나는「호메이니」가 귀국하게 되면「박티아르」정권이 붕괴되고 그럴 경우 파격정권이나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막을 유일한 대안은 군사쿠데타밖에 없게되리라고 확신했다.<무단전재·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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