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경제실적과 인식의 격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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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명한 경영학자가 기업경영을 직접 맡게 되었다. 취임하자마자 오랜 꿈과 구상을 실현코자 대대적인 경영개혁 프로그램을 발진시켰다. 그 기업은 장기간 분위기가 정체돼 있던 터라 모두들 기대를 걸었다. 새 경영자는 진두지휘에 나서 모든 것을 바꿔 나갔다.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해외공장 쪽으로 가서 한동안 현장지도를 했다. 얼마 후 출장에서 돌아온 그 경영자는 공항에 마중 나온 간부들에게 급하게 물었다. "개혁은 잘 돌아가고 있겠지." "예, 개혁 프로그램은 기막히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맞추느라고 회사 경영은 엉망입니다."

벌써 반환점을 돈 참여정부의 경제 실적을 보고 이 이야기가 새삼 생각났다. 갖가지 로드맵도 근사하고 개혁 프로그램도 잘 돌아간다 하는데 경제 실적은 별로 좋지 않다. 당초 공약한 연평균 7%의 성장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바닥으로 내려간 경제는 좀처럼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잠재성장률도 떨어지고 있다. 거기다 요즘은 버블 붕괴와 장기 침체의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낙관적이다. 경제는 마라톤 같은 것이라 단기실적을 가지고 일비일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장래를 대비한 체질개선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구름에 가린 달이 나오듯 밝은 경제가 고개를 내밀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되기를 모두들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염치없는 짓 같다. 그동안 좋은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꾸지 않았는데 어찌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가.

경제가 좋아지려면 오늘을 참아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성공한 개혁을 보면 더 좋은 내일을 위해 명확한 비전을 갖고 낡은 시스템을 고쳐 나갔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설계도가 정확해야 하고 다음 그걸 실천할 프로집단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그걸 믿고 따르게 할 성공사례와 설득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경영학자의 개혁처럼 프로그램은 잘 돌아가는데 실적은 엉망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참여정부 들어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실적이 나지 않으면 개혁 프로그램이 저 혼자 공회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초점을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가진 사람과 기득권층의 저항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경제 체질 강화는 1980년대 초에 한번 본격적으로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때는 체질 강화에 필요하다고 통화도 긴축하고 정부 예산도 줄이고 임금.배당.이자도 억제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강요했다. 내일의 경제를 위해 오늘은 참자고 했다.

지금은 여러 격차를 줄이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개혁도 격차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지역과 사람에 대한 배려가 매우 푸짐하다. 베푸는 것을 좋아해 현재 있는 것으로 다 주지 못하면 빚을 내서라도 준다. 여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도 같이 놀자고 권유하고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서 이렇게 구석구석 챙겨주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재정이 적자가 나고 빚이 느는 것은 별로 겁내지 않는다. 장래에 대해 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기름값이 이토록 가파르게 오르면 난리가 날 법도 한데 모두들 태연하다.

북한을 그렇게 파격적으로 도와주려면 재원 마련이 보통 일이 아니다. 소득을 2만 달러로 올리기 위해선 얼마나 정비해야 할 것이 많은가. 그러나 그런 것들도 격차 해소만 되면 저절로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차근차근 어렵게 풀기보다 한번 흔들어 일거에 해결하려는 방식이다.

정권도 바람몰이 식으로 잡은 경험이 있는지라 경제문제도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경제 인식이나 개혁에 대한 생각이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배우고 경험한 것과는 큰 거리가 있어 많은 사람이 장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 반면 확신에 찬 다른 한쪽은 이런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매우 심각한 것은 여러 경제적 격차에 못지않은 이런 인식의 격차다. 이걸 좁히지 않고는 심기일전이나 경제 호전은 어렵게 되어 있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