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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평해 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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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구씨의 원조는 중국의 강태공-.
「중국구씨사기」에 따르면 강태공의 후손들이 분파해 강, 여, 구, 정, 제, 환, 최, 노씨 등 8개 성이 되었으며 그중 구씨는 산동성 창악현에 위치한「영구」라는 곳에 정착했으므로 「영구」의 「구」를 성씨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대 중국에서 시작한 구씨는 본토를 제외하고 자유중국에 약40여 만명이 살고 있으며 싱가포르·홍콩·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 등 동남아를 비롯, 세계각국에 산재해 있다.

<「구」자를 쓰기도>
중국 구씨 중 일부는 「구」자가 아닌 「구」를 성자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성현 공자의 이름이 「구」였기 때문에 청조에서 성현의 이름을 성자로 삼는 것은 불경스럽다하여「구」자대신「구」를 성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중국본토의 구씨 대부분은 「구」자로 복성했다.
또 현재까지 「구」를 성씨로 하는 가문에서는 아버지의 성자가 「구」자라해도 그 자손들은 호적에 「구」자로 등재하고 있다.
세계구씨종친회(이사장 구사영박사·국립대만대학 교수)는 전세계 구씨의 친목을 위해 조직된 국제기구로 대북시 임기가에 그 본부를 두고 있다. 중화민국 행정원 부원장 구창환씨가 고문을, 입법의원 구한평박사가 명예이사장으로 활동한다.
지난 79년부터 매년 10월에 대북에서 세계구씨종친회를 개최하고있으며 지난 81년에는 중국구씨종친회에서 석사자 한쌍을 한국구씨 종친회에 기증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또 세계구씨 종친회가 벌이는 장학사업의 혜택으로 한국의 구대령군 (19·서울용산동2가5)이 중화민국 문화대학에 유학, 중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나라 구씨의 시조는 구대림장군 (상서공).
「한국평해구씨 사관」에는 『구대림장군은 당나라 고종3년(신라 문무왕3년)에 우리 나라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장군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 경북울진군 평해에 표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구장군과 황장군은 평해의 월송정에 배를 대고 구장군은 해안의 북쪽 언덕 미포에 살아 구씨의 시조가 되었고 황장군은 북쪽 언덕의 조산이란 곳에 터를 잡아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부터 『평해 황씨와 구씨는 친형제처럼 우의가 두터왔으며 성이 다른 일가라 하여 혼인까지 금해 왔다』고 구재승씨(75·평해구씨대종친회장)는 말한다.
시조 구대림이후 우리나라 평해구씨의 세계는 6백여년 동안 실전된다. 황씨가 한국의 대성으로 번성한데 반해 구씨가 희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인듯.
기록상 평해구씨의 1세로 전해지는 인물은 고려 공민왕 때의 구선혁. 그는 당시 이방보장군 등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 벼슬이 민부상서에 올랐다.
고려말 봉익대부판도간서를 지낸 구천우는 평해구씨의 뿌리를 굳게 내린 인물. 평해구씨 2세조인 그는 춘호(지의금부사) 춘경(판사) 춘서(낭장) 춘보(병조참의)등 4형제를 낳아 가문의 번성을 이룬다. 이들 4형제 중 구춘보의 아들 차숭은 조선 세종때 영해부사를 역임했으며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춘추』를 줄줄 외워>
평해구씨는 조선조에 총6명의 문과급 제자를 배출했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대의 명신 안장공구종직. 그는 세종26년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난 경학과 역학의 대가로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한다.
그가 문과에 오른 뒤 교서관에 정자로 근무할 때 하루는 숙직을 하다가 경회루의 경치가 절경이라는 말을 듣고 경회루를 구경하던 중 때마침 산책하던 왕과 마주쳤다.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 「경전」을 욀 줄 아느냐』 고 물었다. 이에 종직이「춘추」한권을 줄줄 내리 암송하니 왕은 크게 감탄하고 이튿날 그를 부교리에 임명했다. 교서관의 정자라면 9품 직의 말단 벼슬이다.
그런데 그를 하루아침에 종5품 직인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했으니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반대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자 왕은 삼사를 모두 불러놓고 「춘추」를 외게 했으나 아무도 구종직을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구종직은 그후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며 그의 두 아들 달손·숙손도 문과에 급제, 달손은 직제학을, 숙손은 이조정낭을 지냈다.
구치곤은 조선 성종대의 명신. 그는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어전에서 왕으로서 지켜야할 도리와 관원의 인사 등에 관한 부조리를 서슴없이 진언했던 절신으로 유명하다.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구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구덕환이 있다. 1925년 경성의전을 졸업, 26년 동생 석환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이동령 등과 독립운동, 해방 후 한국 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다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아깝게도 6·25동란당시 북괴군에 납치되었다.
구월환씨 (연합통신정치부차장) 는 그의 실제.
해방 후 평해구씨는 대문장 구종직의 후손답게 많은 석학들을 배출했다. 구익성(문박·서독 본대 교수), 구인환 (문박·서울대교수) 씨와 창환씨 (전 조선대문리대학장·동교수) 등 형제, 구병삭씨 (법박·고대교수) 와 병삼씨(의박·고대부속병원의사)등이 학계의 얼굴들.
이밖에 구용섭 (태평양화학 고문·세계구씨종친회 부 이사장) , 구용완(변호사·전대전지법부장판사), 구득현(예비역 육군소장·한국종합화학감사역), 구기환(서울신탁은행 전무이사), 구정환(효성물산 전무이사), 구익석 (연합통신편집부국장) , 구영창 (신영금속공업 사장) 씨 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전국 1천8백45가구에 인구는 9천2백 여명. 인구 성씨순위 1백5번째다.

<지명인사>
▲구상섭 (대한슬레트협회전무) ▲구병협 (한일상호신용금고사장) ▲구기섭 (전평해구씨 서울종친회장) ▲구성형(양우건축설계사무소 대표) ▲구범환 (의박·강남시립병원 외과 과장) ▲구룡환 (성미건축연구소대표) ▲구분수 (대성금속공업 사장) ▲구분찬(동아수풍열기공업사장) ▲구분훈(삼화고분자사장) ▲구동현(한국크레졸라통상대표) ▲구재완(한우통상회장) ▲구영춘 (고려화재 동대문지점장) ▲구남철 (노동부 사무관) ▲구병기 (법무부 사무관) ▲구택현(충남서천향교전교) ▲구재한 (대전구의원원장) ▲구일완(신흥화학사장) ▲구능완(농수산부기좌) ▲구준모(성광화성상무이사) ▲구성완 (대전체신공무원교육원교수부장) ▲구재오(공주군교육청장학사) ▲구만완 (전언론인) ▲구재윤 (세무사) ▲구규홍(세무사) (종친회제공· 무순)
글 김창욱기자
사진 양원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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