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사퇴설' 조사 지시한 배후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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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5일 ‘정윤회 문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조전 비서관은 취재진에게 “주어진 소임을 성실히 수행했고 가족과 부하 직원들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정윤회 동향’ 문건 유출 사건은 정윤회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 간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박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검찰 진술이 주목되는 이유다. 청와대에서 대통령 측근 및 친인척 관리를 전담했던 조 전 비서관은 박 회장과 정씨, 실세 비서관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간 갈등 관계에 대해 가장 소상히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5일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한 조 전 비서관은 형사1부(부장 정수봉)와 특수2부(부장 임관혁)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그는 오전 10시쯤 변호인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서류 가방 하나만 들고 청사 안으로 향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최대한 성심성의껏 알고 있는 진실을 검찰 조사에서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조 전 비서관을 상대로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문건의 진위 여부를 추궁했다. 정씨가 지난해 10월부터 매월 두 차례 실세 비서관 3인이 포함된 ‘십상시(十常侍)’와 모임을 갖고 김기춘 비서실장 사퇴설을 유포하는 등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게 문건의 골자다. 조 전 비서관은 문건 내용을 홍경식 전 민정수석과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했다. 문건의 신빙성을 두고 정씨가 언론에 “증권가 ‘찌라시’를 모아놓은 수준”이라고 주장하자 조 전 비서관이 “문건의 신빙성은 6할 이상”이라며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검찰은 특히 조 전 비서관이 문건 작성을 지시한 경위를 집중 조사했다. 조 전 비서관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 비서실장이 사임한다는 얘기가 시중에 돌아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누가 시킨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 전 비서관과 박지만 회장은 1994년 박 회장이 마약류 투약 혐의로 구속됐을 때 담당검사로 인연을 맺었다. 이로 인해 이번 문건유출 사건이 박 회장과 정씨 간 권력 암투의 ‘대리전’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3월 시사저널이 ‘지난해 11월 정씨가 박 회장 미행을 지시했다’는 취지의 기사가 나온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는 얘기다. 정씨가 “문건은 민정수석실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 역시 ‘배후설’을 겨냥한 셈이다. 검찰은 이르면 다음주 초 정씨를 세계일보 고소 사건의 고소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박 회장은 지난 3일 강남구 EG 사무실에 출근하는 모습이 포착된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5일 박 회장 자택 앞을 지키고 있던 취재진을 찾아온 EG 관계자는 “박 회장은 지금 집에 없다.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른다”고 했다. 박 회장은 이날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박관천 “정보원에게서 듣고 문건 작성”=문건 작성자인 박 경정은 지난 4일 검찰 조사에서 “정씨와 ‘십상시’ 모임 참석자가 아닌 정보원으로부터 듣고 문건을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정보원의 신상은 밝힐 수 없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는 문건 유출자에 대해선 “이명박 정부 때부터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로 추정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박 경정이 문건을 유출한 정황을 추가로 확보했다. 박 경정이 청와대 근무 당시 자신이 작성했던 ‘모 광역단체장 비리 첩보’를 도봉경찰서에서 형식만 바꿔 경찰 정보보고서로 올린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검찰은 박 경정이 청와대에서 반출한 문건을 일선 경찰서에서 재활용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박 경정은 경찰이 되기 전인 86년 공군사관학교에 1년간 다니다 퇴교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공군 관계자는 “박 경정이 그해 입학한 사실이 있으며 불명예스러운 일로 퇴교된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글=정강현·박민제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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