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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1. 풀리는 레드 콤플렉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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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대화를 한다니 당신 빨갱이 아닙니까.”

1972년 7월 4일 발표된 ‘남북 공동성명’작성에 깊숙이 개입한 정홍진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에게 모 여류인사가 쏘아붙인 말이다. 정보부에서 근무하면 간첩 잡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지 무슨 대화냐는 것이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기자회견 서두에 “제가 평양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순간 일부 기자들은 놀라서 펜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해 7월 8일자 언론의 톱 기사도 ‘반공교육 강화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였다. 김일성의 사진은 언론에 게재될 수 없었다. 김일성과 만났고,북한 당국과 대화를 한다면서도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당시 우리 사회의 반공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학생들은 북한 사람을 그리라면 얼굴을 빨갛게 했다. 학교에는 ‘자율’‘화목’등의 급훈과 함께 ‘반공’‘방첩’이라는 표어가 담긴 액자가 걸렸다. 방송 대담에서 ‘북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NG가 났다. 축구인 차범근씨는 “해외에서 북한 선수들을 만나면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회고했다. 월북자들의 가족들은 거의 24시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았다. ‘빨갱이’라는 말은 저주와 파멸의 동의어였다. 일부 진보적 지식인층 사이에선 북한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도 있었으나 그들만의 속삭임에 불과했다.

이렇게 타도와 공포의 대상이던 북한이 이제는 도움을 줘야 할 ‘동포들’이 사는 곳으로 다가왔다. 사실상 끝난 체제경쟁의 배경속에 이뤄진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전환점으로 북한은 ‘화해협력의 상대’가 된 것이다. ‘반공ㆍ방첩’구호나 검은 색안경에 험상궂은 얼굴로 카메라를 메고 있던 북한 간첩 사진은 없어진 지 오래됐다. 2002년 서해 교전에서 당한 장병들의 희생도 남북 화해협력의 물길을 역류시키지 못했다.

북한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8ㆍ15 민족대축전’참석차 서울에 온 북한 고위 당국자들이 국립현충원에 가 참배했다. ‘진정성’여부는 지켜봐야 하나 과거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쌀ㆍ비료 지원에 감사하다’는 언급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고위 당국자들이 표명하고 있다. 시장에선 남한제 상표가 붙은 넥타이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평양과 북ㆍ중 국경도시에는 남한의 드라마나 가요가 유행하고 있다. 남한 TV에 나온 것을 본뜬 ‘송혜교 헤어스타일’이 인기를 끌고 있다. 언론 매체에 ‘남조선 괴뢰도당’이라는 표현도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화해협력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북한은 아직 노동당 규약 등에 ‘대남 적화통일노선’을 명기하고 있다. 남한도 북한을 ‘직접적이고 실체적인 군사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반공에서 화해협력으로까지 가는 이정표는 이미 세워졌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적지않은 것이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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