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세대 "회식 싫어"…남의 청첩장 구하고 박피수술까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부어라 마셔라’ 코가 비뚤어지게 과음하는 폭탄주 송년회는 이제 안녕~. 요즘의 신풍속도는 ‘원더걸스’다. 주종이 무엇이 됐든 설혹 그것이 우유 한 잔이라도 참석자들이 ‘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는 의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번 주 토요일 결혼하는 분의 청첩장을 구합니다. 사진·복사·스캔도 괜찮습니다. 연락만 주시면 청첩장이 있는 곳으로 직접 받으러 가겠습니다.”

 한 포털 커뮤니티에 절박한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경기도 화성에 사는 닉네임 ‘웁스 걸’(37·여). 그런데 갑자기 웬 청첩장? 이유는 밑에 나와 있다.

 “남편이 회사 야유회에 가기 싫어해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대려면 꼭 필요해요.”

 게시 글이 오르고 약 5분 만에 ‘웁스 걸’의 휴대전화로 스캔한 청첩장 이미지가 날아왔다. ‘웁스 걸’은 “덕분에 신랑이랑 쉴 수 있게 됐어요. 사는 곳도 가까우니 시간 날 때 차 한잔 해요”라고 감사 글을 올렸다.

 # 평소 매운 음식이 질색인 박모(34·여)씨는 연말에 한 번씩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범벅인 음식을 찾아다닌다. 바로 송년회를 2~3일 앞두고 벌이는 작전이다. 박씨는 “수시로 배를 움켜쥔 채 화장실로 뛰어가고 창백해진 얼굴과 초점 없는 눈으로 며칠을 보내면 자연스레 회식에서 열외가 된다”며 “동료들에게도 철저히 숨기고 1년에 딱 한 번만 사용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 외국계 IT회사에 다니는 박모(36·여)씨는 보름 전 휴가를 얻어 박피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트러블이 나타나 얼굴이 빨갛게 부풀어올랐다. 잠깐 화가 났지만 전화위복이 되리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송년회와 각종 연말 회식을 빠질 명백한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송년회 시즌에 접어들면서 각종 직장인 커뮤니티와 포털 사이트에 ‘회식 빠지는 비법’이 올라오고 있다. 술과 장기자랑이 두려운 젊은 직장인들의 아우성이다.

 진지한 답글을 달며 고민에 동참하는 사람도 이어진다. ‘시댁 행사 참가’ ‘건강검진’ 같은 고전적 수법과 ‘치질 재수술’ ‘라섹 수술’처럼 몸에 칼 대는 방법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전날 노래방에서 목을 학대한 뒤 다음 날 쉰 목소리로 골골하라” “찬바람을 많이 쐬어 약한 감기에 걸리라”는 자해 권고도 적지 않다.

 드라마 ‘미생’에서 시도했다 실패한 ‘삭힌 우유 마셔 배탈 나기’도 눈에 띈다.

 이런 트렌드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직장인 7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9.1%가 ‘연말 송년회 때 평상시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연말 워크숍도 별반 다르지 않다.

 취업 포털 사이트 미디어통이 직장인 4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2012년)에선 62.7%가 ‘워크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무엇이 젊은 세대를 떨게 하는 걸까. 장기자랑과 건배사, 그리고 술이다.

 미디어통 조사에서 직장인들은 워크숍 스트레스의 으뜸으로 ‘상사가 장기자랑이나 건배사를 시킬 때’(47.6%)를 꼽았다. ‘음주 추태’(23.8%)가 뒤를 이었다.

 ‘송년회 꼴불견 인물’을 물은 지난해 ㈜에듀윌 조사에선 1~6위가 모두 술과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술을 계속 강요하는 사람’(39.2%), ‘혼자 취해 주정하는 사람’(25.0%), ‘술값 계산할 때 사라지거나 딴 짓 하는 사람’(20.8%), ‘술기운을 빌려 쌓였던 불만 얘기하는 사람’(10.0%), ‘술 받아서 몰래 버리는 사람’(2.9%),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먹는 사람’(2.1%) 순이었다.

 실제로 술은 종종 송년회를 악몽으로 뒤바꾼다. 지난해 한 대기업 협력업체 회식에선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직원 김모(40)씨가 1차 식사 뒤 여직원 두 명에게 “노래방에 가자”고 했지만 이모(33)씨가 여직원들을 귀가시키자 "왜 멋대로 보냈느냐”며 얼굴을 때려 결국 형사입건 됐다. 김씨는 경찰에서 “이씨가 마음대로 여직원들을 보내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주로 직장 막내들이 겪는 ‘장기자랑’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3년차 회사원 김모(30)씨는 2년 연속 송년회에서 여장을 하고 ‘오렌지 캬라멜’ 등의 노래를 부른 굴욕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다. “철이 들 만큼 든 남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노래를 했던 기억은 정말 지옥 같았다.”

 고조된 분위기에서 터져나오는 성희롱도 단골 메뉴다. 최모(24·여)씨는 “회사에서 또래의 남학생과 인턴으로 일했는데 송년회에서 술 취한 상사들이 우리더러 사귀라면서 ‘오늘 회식 끝나고 둘이 모텔 가는 거 아니냐’고 말해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송년회 기피증이 상사들에게도 ‘전염’되는 걸까. 적지 않은 부서장들도 불만을 표한다. 한 중소기업의 이모(49) 영업팀장은 “요즘 젊은 직원들은 대놓고 싫다는 티를 내서 간부가 오히려 눈치를 본다”고 했다.

 “가끔은 내가 ‘법카(법인카드)’ 긁어주는 사람으로만 비치는 것 같다”는 건 M사 광고팀 김모(49) 부장의 얘기다.

 이런 세태에 비춰 음주가무 일색이던 송년회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다양하다. 20~40대 직원들이 주축인 서울의 한 건축 관련 잡지사는 지난해 회사 근처 레지던스로 역학자를 불러 단체로 신년 운세를 봤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고민을 자연스레 알게 된 건 덤이었다.

 클럽에서 헬스 트레이너에게 댄스 다이어트를 배운 뒤 돼지고기 요리를 시식하는가 하면(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 전사 차원의 직원 패션쇼(신세계인터내셔날)를 열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이색 송년회가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있다는 것. 지난해 뮤지컬을 보는 부서 송년회를 감행했던 J그룹 홍보팀 김모(54) 부장은 “뮤지컬에 저녁식사와 차까지 ‘멋진 부장 코스프레(흉내내기)’를 하다가 추운 연말을 더 춥게 보냈다”며 “정작 가족은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술과 노래로 점철되는 전통적인 송년회도 막상 참가하고 나면 “생각보다 괜찮더라”는 신세대 샐러리맨들의 반응이 많다. 지난 3일 회사 송년회를 치른 직장인 윤다혜(33·여)씨는“처음엔 가기 싫었지만 송년회마저 안 가면 가뜩이나 줄고 있는 동료 간 공동체 의식이 더욱 약해질 것 같아 참석했다”며 “함께 어울리다 보니 동료들의 몰랐던 장기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최근 성인 남녀 782명을 대상으로 ‘연말 계획’에 대해 조사한 결과 65.3%가 ‘송년회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송년회 평균 예상 지출 비용은 약 23만원.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엔 ‘술자리 등 음주가무를 즐기겠다’는 답변이 58.5%로 가장 많았다.

글=김유민·한영혜 기자, 문선영 인턴기자 yoomin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