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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쇼? 드라마? 헷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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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저를 언제까지 어린애로 보실 거에요?”
“아냐, 난 이제 여자로 보고있어.”
여자 친구가 있던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첫 만남부터 둘의 눈빛은 심상치 않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눈치를 챈 남자의 여자 친구는 안절부절 못한다. 드디어 새로운 여자와의 담판을 짓기 위해 여자 친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데….

TV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각 관계’ 스토리인가? 아니다. 21일 저녁 방영된 SBS 버라이어티쇼 ‘X맨’의 한 장면이다. 이날 프로그램에선 ‘X맨 커플’이라 불리는 가수 김종국과 윤은혜 사이에 새롭게 영화 배우 강은비가 등장하면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겉은 오락 프로그램 특유의 다양한 게임으로 꾸며졌지만 그 이면엔 이들 셋 사이의 치열한 심리전이 중심축을 이뤘다. 마지막 장면도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윤은혜와 강은비의 불꽃튀는 대결을 암시하는 것으로 꾸며졌다. 흡사 탄탄한 멜로 드라마에 못지 않는 구성이다. 이같은 ‘이야기 만들기’구성은 ‘X맨’을 비롯한 대부분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한결같은 추세다.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이다.

#대립각을 세워라

'X맨'에서 김종국-윤은혜 커플에 끼어 든 사람은 강은비뿐만이 아니다. 때론 김종국을 좋아하거나(천무 스테파니), 윤은혜에 대한 공공연한 애정을 표시하면서(에릭.잭슨 황) 이들 간엔 3각 혹은 4각 관계의 복잡한 애정 전선이 형성되곤 한다.

대표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인 SBS '연애편지'의 애정 관계는 좀더 선명하다. 여자 출연자 장영란이 그룹 신화의 멤버들을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설정이다. 최근엔 장영란을 좋아하는 새로운 남성(호범)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애정 구도도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있다. 'X맨' 장혁재 PD는 "다소 과장된 감정 표현을 통해 시트콤을 보는 것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고 분석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명 연예인들끼리 "좋아한다"는 것을 서슴치 않고 표현하지만 좀체 스캔들로 비화되진 않는다는 것. 시청자들 역시 이를 실제가 아닌 가상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 간엔 애정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면 동성 간엔 라이벌 의식을 부추긴다. KBS '여걸 식스'에선 시니어 그룹(조혜련.이혜영.정선희)과 주니어 그룹(강수정.심은진.홍수아) 간의 대립 전선이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고 있다. 또 개인 간에도 아줌마(조혜련)와 미시(이혜영), 털털이(정선희)와 새침떼기(강수정) 등으로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여걸 식스'의 이훈희 PD는 "출연진 간의 갈등을 얼마나 증폭시키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캐릭터를 살려라

스토리가 탄탄해지기 위해선 각 출연진의 성격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즉 뚜렷한 캐릭터를 구축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연애편지'의 장영란. 기존 여성 출연진들이 섹시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애쓰는 데 반해 장영란은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남성 출연자들에게 구애를 하는 '푼수형'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장영란은 "본래 내숭 떨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면을 처음에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반응이 좋아 제작진에서도 그걸 계속 살리자고 했다. 이젠 어떤 상황에서도 푼수 스타일로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영란을 비롯 신정환(여성스러움).천명훈(부담스러움) 등은 자신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살려 섭외 0순위로 부상한 경우다.

SBS 한 예능 PD는 "출연하기 전 매니지먼트사와 제작진 사이에 어떤 식으로 연예인의 캐릭터를 살릴까를 협의하는 것은 이제 일반적이다. 특히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인은 좀 더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인물형을 설정한다"고 전했다. 그는 "심지어 보통 사람이 나오는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에게 '순박형 농촌 총각' '깐깐한 학교 교사'와 같은 특정 이미지를 살려줄 것을 요구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스토리와 캐릭터라는 드라마의 두 기본 축을 왜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차용할까. 이훈희 PD는 "감정이입을 이끌어 내기 위해"라고 말한다. 이벤트와 눈요기만으로 시청자의 몰입을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에선 '스타 시스템'과의 연관성도 지적한다. '연애편지' 공희철 PD는 "초특급 스타의 출연은 제한적이다. 오히려 스토리를 강화해 출연진을 고정시켜야 안정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성기완씨는 "과거 버라이어티쇼는 연예인들이 우루루 몰려 나와 신변잡기식의 얘기만을 늘어 놓아 시청자들이 소외되곤 했다. 반면 스토리가 있으면 사적인 얘기를 해도 어떤 맥락을 갖게 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예인 모임'에 초대된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고 진단했다. '쇼의 드라마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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