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불법 감청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 100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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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국회에서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감청 장비 20대로 불법 감청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1000명"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휴대전화 가입자만 3700만 명에 달한다"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국회의원을 지칭)"이라고 주장했다. 도.감청에 대한 통신분야 주무 장관의 한심한 인식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민 한 사람이라도 통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 주무 장관으로서 마땅히 사과해야 할 일이다. 사과는커녕 위증 혐의를 피해가기 위해 말 바꾸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딱할 뿐이다. 정통부 장관은 국민이 불안해 하는 원인도 헛짚었다. 도.감청을 따져 묻는 여야 의원들이 아니라 사과도 반성도 제대로 하지 않는 정부 때문에 국민은 불안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국가권력 남용 사건에 대한 시효배제까지 거론했다.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은 대표적인 국가권력 남용 사례다. 식사 자리의 사적인 대화 내용을 도청한 274개의 테이프가 쏟아져 나왔다. 국정원은 휴대전화 도.감청 사실까지 시인했다. 더구나 현 정부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불법 테이프 내용까지 공개하고 싶다는 입장이다.

국정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불법 도.감청을 감행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불법 도.감청은 아예 뿌리뽑겠다는 의지다. 우리가 역대 정통부 책임자들에게 위증 책임을 묻도록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가 확실하게 사과하고 과거 잘못까지 철저히 추궁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국민 불안은 해소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휴대전화 도.감청 대책에 대해 "전화로 사적인 대화만 하고 비밀사항은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현직 장관까지 휴대전화를 불신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내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제 서울에서 부산까지 뛰어내려가야 할 판이다. 이런 정부 아래서 어떻게 불법 도.감청이 근절되고 통신 자유가 보장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